돈의 신선, 유해(劉海)를 만나다
“밥 말고 그냥 돈 주시지예. 일단 돈이 있어야 식구가 되지예.”
영화 <친구2>에서 ‘언제 조직원들이 다 같이 밥이나 먹자’는 준석(유오성 분)의 말에 대한 성훈(김우 빈 분)의 대답이다. <친구> 이후 12년 만에 돌아온 <친구2>는 동수(장동건 분)의 죽음을 지시한 혐의 로 수감된 준석이 17년 만에 출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준석은 몰라보게 달라진 세상에 위기감을 느 끼며 흩어져 있던 자신의 세력을 다시 모은다. 이 과정에서 감옥에서 만나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동수의 아들, 성훈을 자신의 오른팔로 삼는다. 준석의 세대를 반영하는 <친구>와 달리 <친구2>는 준 석의 세대가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의 세대, 즉 성훈의 세대를 탐구하는 영화다. 성훈의 세대로 대변 되는 아들 세대는 식구도, 친구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성훈은 10대때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돈 때문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거나 살던 집과 학교를 떠나야 했던 이 세대는, 돈을 인간관계의 우선 조건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돈이 문제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공부해도 취업은 안 되고, 막상 직장을 구해도 손에 쥐는 돈은 고작 88만원정도이다. 그 돈으로 살아가자면 연애는 물론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경우조차 있다고 한다. 이들을 일컬어 ‘삼무세대(三無世代)’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누군가 돈을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상상마저 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옛날 우리 조상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옛 그림 가운데는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갖다 주고 힘든 일을 도와주러 다니는 신선을 그린 그림들이 있기 때문이다.
돈을 나누어 주는 신선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해(劉海)’라는 신선을 알 필요가 있다. 유해의 본명은 유조(劉操)인데, 중국의 오대 혼란기에 후량(後粱)의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어느 날, 정양자 (正陽子)라는 도인이 동전 위에 계란 열 개를 쌓아놓고 유조에게 보여주었다. 많은 녹을 받는 재상으로서 우환을 무릅쓰고 사는 일은, 금전 위에 쌓은 계란보다 훨씬 위태롭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에 유조는 크게 깨우친 바가 있어 재상직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신선이 되었다. 신선이 된 유조는 이마에 머리카락을 내려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두꺼비를 타고 다니면서 어려운 백성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유해가 타고 다니던 두꺼비는 세 발 달린 영물로, 그를 세상 어느 곳으로든 데려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두꺼비[蟾]를 타고 다니거나 어깨에 메고 다니는 이 신선의 호가 ‘해섬자 (海蟾子)’이다. 성씨를 따서 흔히 ‘유해섬(劉海蟾)’ 혹은 줄여서 ‘유해(劉海)’라고 한다. 또 두꺼비를 한 자로 하마(蝦蟆)라고도 하므로 그를 ‘하마선인(蝦蟆仙人)’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중기에 활동한 화가 이정(李楨, 1578~1607)이 그린 <기섬도(騎蟾圖)>는 유해가 두꺼비를 타 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세 발 달린 거대한 두꺼비가 신령스러운 입김을 피우면서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다. 게다가 두꺼비 위에 걸터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유해의 얼굴이 두꺼비와 닮은 듯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부부가 오랫동안 같이 살다보면 얼굴마저 닮는다더니 유해와 두꺼비도 그런 모양이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화가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그린 <유해희섬(劉海戱蟾)>은 유해가 세 발 달린 두꺼비와 노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유해를 태우고 다니던 두꺼비는 가끔 우물 속으로 도망쳐버려 유해를 골탕 먹이곤 했다. 그럴 때면 이 신선은 돈을 좋아하는 두꺼비의 심리를 이용해 긴 끈에 동전을 매달아 두꺼비를 유인했다. 심사정의 그림은 이 장면을 그린 것이다. 맨발에 남루한 옷을 입은 유해가 동전을 묶은 끈으로 두꺼비를 끌어올리고서 야단치는 순간을 그렸다. 이를 드러내고 꾸짖는 화난 선인과 대조적으로, 동전을 본 두꺼비가 다리 하나만을 땅에 디딘 채 뛸듯이 좋아하는 모습이 코믹하다.
두꺼비나 선인 모두 동작이 격렬해 화면 전체에 역동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빠른 붓놀림으로 대충 그린 듯한 그림이지만,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흡사 동영상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경지는 죽는 날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심사정이기에 가능하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활동했던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은 표주박을 타고 물 속에 있는 두꺼비를 희롱하는 유해를 섬세한 필치로 그렸다. 풀어 헤친 짧은 머리와 웃음을 머금은 선 인의 표정에서 천진난만한 소년의 장난기가 느껴진다. 두꺼비를 유인하기 위해 들고 있는, 동전을 매 단 빨간 끈이 이 그림의 감상 포인트이다. 동전의 숫자까지 선명하게 묘사된 사실적인 표현과 동전을 향한 두꺼비의 애틋한 표정이 그림을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푸른 물결 출렁이는 역동적인 구도와 사실적인 대상 묘사로 큰물에서 낚이는 세 발 달린 두꺼비의 신화적 이미지가 강하게 표현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많은 화가들은 재물을 상징하는 두꺼비와 돈을 나누어 주는 신선 유해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렸다. 이러한 유해 그림을 감상하면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돈의 진정한 의미가 ‘쓰임’ 과 ‘나눔’에 있다는 것이다. 애당초 돈이라는 말이 ‘돌고 돌아서’ 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그 짐멜(1858~1918)은 자신의 저서 《돈의 철학》에서 돈이란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표현이자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돈을 쌓아두기만 하는 것은 돈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며, 돈의 가치는 상호관계 속에서 사용될 때 발휘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 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유해야말로 돈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문득 유해에 관한 일화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유해가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전 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유해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마다 연말이면 구세 군 자선냄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큰돈을 두고 갔다는 뉴스를 듣는다. 지난해에도 명동 입 구에 있는 자선냄비에서 “돌아가신 부모님 뜻을 받들어 작은 씨앗을 숭고한 숲 속에 띄워 보낸다”는 편지와 함께 1억 570만 원짜리 수표가 나왔다고 한다. 선행은 유행처럼 번져 충북에서는 여든 살의 노점상 할머니가 사회단체를 찾아와 “어려운 곳에 써달라”며 1억원이 든 봉투를 놓고 갔다고 한다. 이 분들은 아마도 자신은 누더기를 입고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나눔을 실천한 유해의 화신임이 분명하다.
유해를 닮은 분들의 나눔 덕분에 겨울이 더는 춥지않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제야 장자가 말한 ‘여물위춘(與爲春: 사물과 더불어 봄이 된다)’이란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봄은 자연의 변 화로도 오지만, 나눔을 통해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봄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래서 국립부여 박물관에 소장된 백은배의 <하마선인도>의 화제에는 돈을 나누어 주는 신선 유해를 ‘걸어 다니는 봄 (脚春)’이라 했나 보다. 이처럼 돈은 ‘쓰임’과 ‘나눔’에 따라 사람들 사이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오직 경계할 것은, 아무리 생활이 팍팍하고 힘들어도 돈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영화 <친구2>에서 조직원을 모으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줘야 한다며 ‘돈’을 강조하는 젊은 성훈에게, 사십 줄을 넘긴 준석은 이렇게 말한다.
“같이 배고프고, 같이 도망댕기고, 같이 죽을 뻔하고, 같이 엉엉 울어도 보고, 그래야 형님 동생 식구 가되는기다.돈만준다고되는기아이고.”
글·김정숙 | 진행·이소진 | 디자인·김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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