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팝 아티스트 줄리언 오피 : 도시를 걷는 사람들, 그 아름다움과 에너지
영국 팝아티스트의 경쾌한 행보
“예술은 하나의 은유이자 상징입니다. 산문이 아니라 시인 것이죠. 이미 만 들어진어떤것에서더큰진실을찾는과정말입니다.”영국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 Martin)이 말한 예술의 정의에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다. 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 골드스미스 컬리지 출신의 yBa 아티스트들이 그의 가르 침을 받고 세계적인 아티스트 반열에 올랐다.
1982년 졸업한 줄리언 오피도 그 중 한 명이다. 현대 시각예술에 대한 스승의 확고한 가르침은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공공 사인물과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고도로 단순화 된 인물 형상,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술을 차용한 작품은 현대 사회에 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비평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80년대에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과 오브제를 재해석한 조각작품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작업은 이후 컴퓨터를 사용하는 드로잉으로 발전하면서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도 자리를 굳혔다. 디지털화와 인쇄, 제작에 대한 그의 기술적인 관심은 작품형식에 있어서도 확고한 위치를 다지는 기반이 됐다. 199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인물을 다루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친숙한 사람을 포함해 유명한 인물들의 커미션 작업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차용했다.
많은 유명인들이 커미션 작업을 통해 ‘오피 스타일’의 인물로 탄생했는데 그 중 2000년에 제작한 영국 뮤지션 블러(Blur)의 앨범 재킷과 2006년 유투(U2)의 월드 투어 LED 작업이 대표적이다.
“줄리언 오피의 작업은 초기의 플랫한 형식과 선명한 컬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어요. 미니멀한 형태, 산업적인 컬러링, 움직임의 다이내미즘이 줄리언 오피 작업의 세가지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날 많은 팝아티스트가 존재하지만 줄리언 오피만큼 구성면이나 컬러면 에서 밀도가 높은 작업을 완성하는 작가는 보기 드물 겁니다.” -유진상(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전시기획자), 줄리언 오피 개인전 2014 오프닝
거리를 걷는 익숙한 익명의 사람들
줄리언 오피의 주된 관심사는 ‘사람’이다. 그동안 그는 스튜디오에서 고용한 모델 혹은 주변인을 촬영하거나 의뢰받은 작업을 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거리를 나서 ‘진짜’ 일상의 인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스튜 디오를 걸어가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걸어가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두었죠. 나중에는 장소의 범위를 넓혀서 템스강의 사람들을 촬영했습니다.”
그는 조수와 함께 런던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움직이는 LED 작품을 만들었다. 지난 5개월간 작업한 작품들은 10명에서 11명의 인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옆모습으로 걷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벽화와 건축양식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다. 검은 LED패널을 가로질러 걷는 인물들은 건축가,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 웨이트리스 등 각각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익명의 군중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자신의 존재성을 강렬하게 내뿜고 있는 것이다.
인물마다 걷는 모습, 시선, 움직임의 리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인물이 걷는 속도와 반응을 계산해 수학적인 알고리즘을 적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걷는 군중’이란 공기만큼 익숙한 존재다. 그러나 치밀하게 관찰되고 계산된, 실감나는 걸음걸이를 쫓다 보면 그동안 놓쳤던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익숙한 풍경에서 오는 생경한 풍경, 찰나에 다가왔다 스치듯 사라지는 그 사람들, 무수히 흩어지는 잔상들.
다이내믹한 서울 풍경
줄리언 오피는 올해 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서울의 사람들을 작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있는데 서울 전시를 준비하면서 굳이 런던을 꼭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는 서울에 있는 사진가에게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의뢰했다. 다양한 지역에서 촬영한 약 3,000장의 사진이 런던에 있는 그에게 도착했고 그는 사진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런던 사람들을 찍은 사진은 보통 검은색이나 회색이 대부분이고 그림자가 많아서 칙칙한 느낌이 들곤해요. 그런데 서울 사진들은 그림자가 없고 사람들 의상감각이 제각각 다양해서 정말 놀랐어요. 마치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요. 사람들이 착용하고 있는 액세서리, 핸드백, 쇼핑백, 레이스 달린 의상, 구두 등 외형적인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지요.”
화려한 의상과 활기 넘치는 사람들이 그의 작업에 영향을 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서울 연작을 보면 대담한 컬러 사용이 눈에 띄게 늘어났으며 인물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의 디테일 또한 강해졌다. 신발끈 묘사와 같은 디테일은 인물의 설명을 단순하게 마치는 그의 작업 스타일에 있어서 의미있는 변화이기도 하다. 이번 서울 연작은 지역 이름을 따서 <신사동을 걷는 사람들> <사당동을 걷는 사람들> 등으로 지었다. 그가 서울 사람들에게서 받은 또 다른 인상은 없었을까. 그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보며 걷고 있더군요.”
그는 수 천장의 사진 중 서너장의 사진을 뽑아내고, 인상적인 인물을 선정해 화면에 배치하고 드로잉을 한다. 드로잉이 끝나면 공장에서 플라스틱 커팅을 통해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50개의 컬러 칩을 기본으로 색을 지정한 뒤 각각의 레이어를 잘라낸 뒤 붙이는 식이다.
그의 신작을 보면 도료가 아닌 비닐 소재의 레이어를 잘라내어 화면에 구성하는데 이 ‘비닐 페인팅’은 기술적인 면에서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다. 대량 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로는 작품의 섬세한 컬러를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또 치밀한 계산이 아니고서는 잘라진 비닐 레이어를 정교하게 짜맞추는 것 또한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모든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물은 똑 떨어지게 심플하니 이것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각하는 오피
줄리언 오피의 프로필을 보니 흥미로운 이력이 눈에 띈다. 아니시 카 푸어(Anish Kapoor), 리처드 앤트워스(Lichard Wentworth)와 함께 1980년대의 신 영국조각운동(New British Sculpture)에 몸 담았다는 사실 말이다. 그간 평면회화 사이에 드문드문 끼어있던 플랫 한 조각 품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그가 조각가로 처음 데뷔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되새김질된다. 사실 그는 조각작업을 한시도 쉰 적이 없었다. 국제 갤러리 신관인 K3의 공간사진을 보고 조각작품에 대한 창작열이 용솟음쳤던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제갤러리에서 첫 한국 개인전을 했기 때문에 K2공간은 이미 알고 있어서 전시를 준비하는데 도움이됐죠.(첫개 인전은 2009년이었고 신관은 그 이후인 2012년에 지어졌다.) 사진을 받아보고 정말 기뻤어요. 전시장은 내관이 중요한데 기둥도 없고 조명도 완벽한, 한마디로 아름다운 공간이었죠. 이곳에 어울릴 다이내믹하면서 대작을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골격이 적당한 인물을 찾았습니다.”
그의 눈에 포착된 인물은 이웃이자 자신의 아이들을 가끔 봐주기도 하는 릴리(Lily)와 핀(Finn)이었다. 그는 3D 조각을 만들기 위해 인물의 머리를 고정시키고 360도 회전하는 스캐닝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레진으로 만든 조각품 위에 색채는 직접 입혔다. 납작했던 그의 인물이 입체적인 형태로 공간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도시에 우뚝 선 오늘날의 초상
도시사람들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자신의 목적을 향해 분주히 걷는 현지인과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바라보는 관광객. 줄리언 오피는 관광객의 ‘멈춘다’는 행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17, 18세기의 전신 초상화는 여왕이나 왕처럼 고귀한 신분이 아니면 등장할 수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의 크기 역시 인물과 정비례하거나 더 크게 그려져서 우상화되었죠. 관광객의 멈춰선 포즈는 바로 현대인의 초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그리스와 이집트의 조각품, 일본의 망가, 18세기 일본 목판화 등 다양한 예술품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했듯이 그의 예술적 탐구는 더 넓은 영역 으로 뻗어간다.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남자, 한쪽 다리에 몸의 중심을 기운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 보는 청년, 외투를 가방에 걸치고 사진을 찍는 듯 멈춰선 여인 등 도시 속에 멈춰선 인물들은 고전 초상화의 계보를 잇듯 모두 전신화로 제작되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작가의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류가 사람을 이미지로 재현한 순간부터 시작된 역사의 바통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오늘날의 초상화를 대면하는 경험은 심장이 짜릿할 정도로 흥분되는 일이다. 줄리언 오피는 이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제스처로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글·이소진 | 디자인·계희경 | 사진·한상무 | 도움·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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