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na 피플

장흥 아틀리에에서 만난 세 아티스트 임지빈, 서유라, 최재혁 | 유쾌하고, 완전하고, 진중하게

by 하나은행 2014. 4. 16.
Hana 피플

장흥 아틀리에에서 만난 세 아티스트 임지빈, 서유라, 최재혁 | 유쾌하고, 완전하고, 진중하게

by 하나은행 2014. 4. 16.

 

경제적 팽창이 두드러졌던 1980년대와 문화가 융성했던 199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의 특징이 있다. 대중미디어가 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새로운 이미지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현대 사회에 스며든 욕망과 상품의 힘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장흥 아틀리에의 동갑내기 작가인 임지빈, 서유라, 최재혁은 그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이다. 유쾌하고, 완전하고, 진중하게 예술계에 뜨거운 피를 수혈하는 젊은 아티스트들을 만나본다.

 

 

장흥 아틀리에

 

장흥 아틀리에는 양주시에 위치한 예술 복합 문화 단지인 ‘장흥아트파크’에 자리 잡고 있는 예술촌이다. 2006년 낡 은 모텔을 리모델링한 ‘제1 아틀리에’에 이어 2008년에 는 ‘제2 아틀리에’가 문을 열었다.

 

레지던시는 예술가에게 쾌적한 창작 공간뿐만 아니라 전시 및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청년 작가부터 굵직한 중견 작가까지 50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으며 예술가 사이에 조성된 활발한 교류의 분위기는 아틀리에의 자랑거리다.

 

 

 

임지빈 | 웰컴 투 베어브릭 월드!

 

“물건을 소유하는 행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대인의 표피적인 집착에 관심이 있었어요. 베어브릭은 그 욕망과 집착에서 탄생한 작품이죠.”

 

임지빈 작가의 작품에는 사회가 좇는 욕망이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냉소와 비판적인 시각은 없다. 대신 시종일관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다.명품 로고를 잔뜩 뒤집어 쓴 베어브릭과 축 늘어진 배를 붙잡고 있는 슈퍼 히어로 할아버지, 유명 브랜드의 간판 캐릭터들까지. 그는 저 먼 어딘가에서 세상을 향해 한숨섞인 비웃음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뒹굴다가 재빠르게 잽을 날리는, ‘나 역시 명품이 좋다’라고 말하는 솔직한 사람이다.

 

작업에 차용한 베어브릭(Be@rbrick)은 곰을 의인화한 피규어 제품으로 일본의 장난감 회사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만든 캐릭터다. 한정판이 출시되면 전세계의 베어브릭 컬렉터들이 제품을 손에 넣기 위해 매장 앞에 장사진을 치는가 하면 값을 배로 불려 되팔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곰인형을 갖고 놀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 소유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집착으로 변모하는 것을 보면서 곰은 그의 중요한 모티프가 됐다.

 

 

 

박제 시리즈 역시 인간의 강박증적인 소유욕을 꼬집는 작품이다. 살아 있는 동물을 박제함으로써 자신의 능력과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는 집착은 일종의 페티시(fetish)인 것이다. 최근 그의 곰은 거대한 풍선으로 등장했다. 크기가 10m 가까이 되는 ‘풍선곰’은 좁은 공간 가득 끼어있거나 문을 빠져 나오지 못해 허공을 향해 팔을 내젓는다. 몸집을 가득 키워버린 욕망의 조각품, 그러나 그 속에는 조그만 구멍만 생기면 금세 빠져버릴 공기뿐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기억의 잔상’ 시리즈는 작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든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몸동작을 연속 촬영한 장면처럼 곰 얼굴이 줄줄이 붙어서 벽을 흘러가거나 몸통 여러개가 이어진다. 이는 눈이 기억하는 잔상을 더듬어 조각으로 표현한 모습이다.

 

 

 

“세상이 워낙 빠르게 흘러가잖아요. 사회의 흐름이 점점 가속도가 붙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서 놓치는 소중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말 그대로 요즘 임지빈 작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바쁘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시가 열리는가 하면 영화, 매거진과의 협업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한적한 아틀리에에서 홀로 조각과 씨름하다가도 미디어의 화려한 세계에 기꺼이 그 존재감을 빛내는 스타성 있는 작가, 위트를 잃지 않는 유쾌함이 그의 본모습이자 무기다. 그의 곰들처럼 말이다.

 

 

 

서유라 | 이토록 아름다운 책 한 점 속에

 

무심하게 쌓인 책을 뒤로 하고 책 한 권이 서있다. 아름다운 표지의 그림과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펼쳐보고 싶은 욕구가 충동질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질서정연한 향연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었던 본능적인 행동은 여기에서 잠시 멈춰야 했다. 책은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남기 위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그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붓으로 재현된 이미지는 그 자체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 속에서 풍겨 나오는 지적 호기심, 표지를 한 겹 넘기기 전에 찾아오는 기대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은밀하고 짜릿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Contemporaryartbook’,oiloncanvas,130×130cm,2012
‘Contemporaryartbook’,oiloncanvas,130×130cm,2012

 

 

서유라 작가는 이토록 아름답게 책을 그린다. 인류가 끊임없이 탐험해온 지식과 경험의 총체, 역사의 서사성이 고스란히 담긴 상징물을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녀의 ‘책 그리기’는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출발한 것이며 어렵고 무겁게만 느끼는 선입견에 대한 작은 해방구였다. 그래서인지 책이 수북이 쌓인 압도적인 그림 속에는 어릴적 블록놀이처럼 ‘쌓기’에 대한 유희적인 행위가 녹아있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에 따라 책을 선정하고, 전체적인 색감을 의도적으로 변형한다.

 

2.‘Vintagebooks-RedRidingHood’,oiloncanvas,45.5×45.5cm,2013 3.‘StoryBook’,oiloncanvas,130×130cm,2011 4.‘PortraitofKoreanart’,oiloncanvas,130×130cm,2012
2.‘Vintagebooks-RedRidingHood’,oiloncanvas,45.5×45.5cm,2013 3.‘StoryBook’,oiloncanvas,130×130cm,2011 4.‘PortraitofKoreanart’,oiloncanvas,130×130cm,2012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에는 패션, 여행, 음악, 영화, 미술 등 그녀의 관심사가 포괄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쌓기에서 더 나아가 별, 하트, 꽃 등 주제에 따라 자신만의 조형적인 구성을 시도했다. 현대미술 책으로 구성한 <Contemporary art Book> 작품에서는 책 제목을 통해 주제를 연상할 수 있다. 책은 세워지기도 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면서 하트 모양을 이룬다. 여기에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작품을 표지로 얹은 팝아트 책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낸다. ‘빈티지 북 시리즈’는 스스로 ‘범위가 넓고 너르다’는 그녀의 최근 관심사가 반영된 작품이다.

 

“패션지 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잡지를 그렸습니다. 이후에는 관심사에 따라 분야가 넓어 졌어요. 여성을 다룬 책만을 모아 그 속에 감춰진 시각을 분석하기도 했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그리기도 했지요. 최근 작업하고 있는 빈티지 북은 앞으로 좀 더 넓은 주제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어요. 작업하면서 끊임없이 다음 주제를 연구 중입니다.”

 

서유라 작가는 4월 대만에서 열리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부산아트쇼>, W.K 뉴욕갤러리 개인전, 파리의 시테레지던시 참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녀의 캔버스 속 서가가 조만간 더욱 풍성해지리라는 예감이 든다.

 

 

 

최재혁 | 골동품 속에 스며든 일상의 가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지만 사실 그 가치는 대단한 것이죠. 오늘이 모여 결국 역사가 되고 시대의 표상이 되는 거니까요.”

 

최재혁작가는 골동품에 겹겹이 축적된 일상의 가치를 그린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에 의해 사용했을 손 때 묻은 물건들, 색이 바래고 낡은 소품 속에서 그는 인류가 쌓아온 문화의 한 면을 발견했다. 어느 날 이스탄불의 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그는 넋을 놓을만큼 강렬한 광경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골동품이 즐비하게 진열된 상점의 모습, 자신만의 역사와 시간을 품고있는 물건이 빽빽하게 뒤섞여 있는 광경은 마치 시간의 용광로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그는 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커다란 캔버스에 자신이 본 풍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밀도 있게 그렸다.

 

1. ‘구성(Composition) #9’, oil on canvas, 162.2×130.3cm, 2013 2.‘골동품(antique) #26’, oil on canvas, 72.7×53cm, 2013
1. ‘구성(Composition) #9’, oil on canvas, 162.2×130.3cm, 2013 2.‘골동품(antique) #26’, oil on canvas, 72.7×53cm, 2013

 

<시간>은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이후 작가는 오브제에 더 주목하기 위해 배경을 없애고 화면 구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Composition 시리즈’는 중력에서 해방된 듯 물건들이 화면 위를 자유롭게 떠다닌다. 최근 작품인 ‘골동품 시리즈’는 오브제 크기와 위치, 구성면에서 작가의 개입이 점점 더 반영되었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를 위한 탐구 과정 중’이라고 말한다.

 

골동품은 외형적인 면에서도 요즘 찾아보기 드문 희소성을 띠고 있다. 작가는 이를 치밀하고 세세하게 표현해 최상의 리얼리티를 끌어낸다. 그의 그림에는 충실한 재현이 빚어낸 회화 작품의 감동이 있다. ‘잘 그린 그림’ 앞에서 드는 경탄 같은 것 말이다. 자세히 뜯어볼수록 작가의 회화적 내공이 느껴지는데 여기서 타고난 화가의 기질이 드러난다.

 

3.‘시간(time)’, oil on canvas, 260.6×162.2cm, 2012
3.‘시간(time)’, oil on canvas, 260.6×162.2cm, 2012

 

작가는 중학생 때 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고를 거쳐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마음속에는 회화를 향한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았고 결국 회화과로 전향했다. 드넓은 현대미술의 세계를 탐구하며 추상적인 이론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자’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낸 지금, 그는 행복하다.

 

“저는 물건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소비적인 즐거움 대신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즐거움을 얻습니다. 누군가 회화는 ‘표현의 퇴화’라고 했지만 전 ‘표현의 회귀’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난해 가을, 성공적으로 개인전을 치른 그는 앞으로 주제별 작품의 카테고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오브제 를 통한 일상의 탐구는 이제 그 서막을 연 것이다. 

 

글·이소진 | 디자인·계희경 인물 사진·이명수 | 헤어&메이크업·양신혜, 이의진(수빈 아카데미) | 도움·장흥 아틀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