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na 컬쳐

왕궁의 울타리 속 빛과 그림자, 황금 권력과 스타들

by 하나은행 2014. 7. 30.
Hana 컬쳐

왕궁의 울타리 속 빛과 그림자, 황금 권력과 스타들

by 하나은행 2014. 7. 30.

사진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데 유난히 심혈을 기울였다. 국왕의 초상은 대부분의 국민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국왕은 위엄과 품격을 갖춘 초상화로 ‘하늘이 내려준 왕’을 모시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 위엄있는 군주, 헨리 8세

ʻPortrait of Henry VIII, King of Englandʼ, Hans Holbein the Younger, oil on panel, 28×20cm, 1537
ʻPortrait of Henry VIII, King of Englandʼ, Hans Holbein the Younger, oil on panel, 28×20cm, 1537

유럽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관광 명소 중 하나가 한때 왕과 왕비가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왕궁들이다. 윈저성이나 베르사유, 쇤부른 궁의 휘황찬란한 홀과 복도를 거닐다 보면 저절로 왕족이 된듯한 기분에 젖게 된다. 금빛으로 치장된 벽에는 이름 모를 왕족의 초상이 줄줄이 걸려 있다.

그중 하나의 초상에 눈길이 닿는다. 당당한 체격에 위엄 가득한 표정, 무엇보다 매서운 눈매가 인상적인 이 초상의 주인공 은 바로 ‘천일의 앤’의 주인공, 여섯 명의 왕비를 갈아치운 영국 국왕 헨리 8세다. 부엉이의 눈처럼 부리부리한 눈빛 속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초상화가 그려지기 몇 년 전인 1533년. 그는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로마 교황청에 맞서서 스스로 교황을 파문하고 영국 성공회를 세웠다. 그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아라곤(스페인의 한 지역)의 공주 캐서린과 이혼하고 어여쁜 영국 처녀 앤 볼린과 재혼하려 했으나, 강력한 가톨릭 국가 스페인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교황청은 헨리 8세의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불같이 노한 왕은 가톨릭과 등지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조리 처형장으로 몰아넣고 성공회를 창립했다. 그러나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며 맞아들인 두번째 왕비 앤 볼린을 불과 3년만에 처형시켜 버렸다. 죄명은 간통이었지만 실은 아들을 사산하고 딸(엘리자베스 1세)만 낳은 그녀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한때 자신과 살을 맞대고 살았던, 자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은 왕비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일이 어디 쉬운가? 더구나 교황과 결별하는 결단을 내리면서까지 선택한 배우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헨리 8세의 거침없는 성격을 감히 가로막을 수 있는 신하는 없었다. 이후 그의 다섯번째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 역시 간통죄로 참수되었다. 홀바인 2세가 그린 초상화 속의 헨리 8세를 보면, 그처럼 무서운 성격이 조금은 엿보이는 듯싶다. 국왕인 동시에 군인이기도 했던 그는 홀바인에게 군주의 위엄이 잘 드러나게 그리도록 명령했다 고 한다.

 

 

# 찰스 1세, 심약한 왕의 초상화

ʻCharles I on Horsebackʼ, Anthony van Dyck, oil on canvas, 61×96.5cm, 1637
ʻCharles I on Horsebackʼ, Anthony van Dyck, oil on canvas, 61×96.5cm, 1637

비단 헨리 8세뿐만 아니라 유럽의 군주들은 너나할것없이 군왕의 위엄이 드러나는 초상을 얻기 위해 애썼다. 1635년 영국왕 찰스 1세는 루벤스의 제자인 반 다이크를 궁정화가로 초빙해왔다. 당시 반 다이크는 최고의 초상화가로 플랑드르 일대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던 화가였다.

반 다이크가 찰스 1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린 초상이 1638년 완성된 <말 탄 찰스 1세 >다.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진 이 초상에서 찰스 1세는 커다란 말을 타고 가터 기사의 훈장을 단 위풍당당한 차림새다. 갑옷의 반짝임을 실감나게 묘사한 솜씨에서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반 다이크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어두운 숲을 벗어나 햇살 환한 들판으로 나서는 초상의 모양새를 통해 찰스 1세는 ‘과인의 통치로 혼돈이 끝나고 이제 태평성대가 오노라’라고 선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가의 예리한 필치는 갑옷의 번쩍임 같은 사실적인 외양 뿐만 아니라 찰스 1세의 어둡 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표정, 생기 없는 눈빛까지 고스란히 되살려 놓았다. 이 초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찰스 1세는 의심이 많고 리더십이 현저히 부족한 사람이었다. 결국 찰스 1세의 독단적인 정치는 왕당파-의회파 간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 내전에서 패한 찰스 1세는 1649년 1월 런던 화이트홀 궁전에서 참수된다.

 

 

# 어린공주의 우아함, 마르가리타

Portrait of the Infanta Margarita Aged Fiveʼ, Diego Velázquez, oil on canvas, 88×105cm, 1656
Portrait of the Infanta Margarita Aged Fiveʼ, Diego Velázquez, oil on canvas, 88×105cm, 1656

위엄을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국왕의 초상들과는 달리,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의 초상에서는 공주의 자태를 최대한 어여쁘게 그리려는 화가의 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자신의 삼촌이자 사촌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한 사이였다. 펠리페 4세는 궁정화가였던 벨라 스케스에게 정기적으로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을 그려 합스부르크 왕가에 보내도록 명령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 르가리타 공주의 초상이 세 점이나 소장돼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초상화 속 공주는 다섯살의 어린 아이지만 왕실의 일원답게 우아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우아함의 결정체 같은 초상에서는 이상하게도 일말의 비애 같은 감정이 스쳐간다. 공주는 1666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지만 이들 사이에 태어난 네 명의 아기 중 세 명이 사산되거나 태어나자마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공주 역시 스물두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평생 궁에 갇혀 살다 빈 호프부르크 궁에서 죽은, 그리고 6년의 짧은 결혼생활 중 쉴 새 없이 네명의 자녀를 낳아 그 중 셋을 잃은 그녀의 삶 어디에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순간이 있었을까.

 

 

# 오스트리아의 스타 왕비, 엘리자베스

ʻEmpress Elisabeth of Austria in Courtly Gala Dress with Diamond Starsʼ, Franz Xaver Winterhalter, oil on canvas, 1865
ʻEmpress Elisabeth of Austria in Courtly Gala Dress with Diamond Starsʼ, Franz Xaver Winterhalter, oil on canvas, 1865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였던 엘리자베스의 초상에서도 이와 엇비슷한 그림자가 느껴진다.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엘리자베스는 1855년 열 여덟 살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결혼했다. 아만다 베르그슈테트가 그린 공식 초상에 묘사된 엘리자베스의 모습대로 그녀는 당대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아리따운 공주이자 황제의 신부였다.

하지만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엘리자베스의 삶은 ‘공주는 왕 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의 결말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펼쳐졌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남편의 사랑은 차라리 족쇄처럼 느껴졌고, 며느리를 병적으로 질투한 시어머니 조피 황태후는 네명의 손자 손녀들을 뺏어가다시피 했다.

아들 루돌프 황태자는 서른이 되자마자 권총자살로 생을 저버렸다. 결혼생활 내내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고생했던 엘리자베스는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감옥 같은 비엔나의 황궁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했다. 그녀는 유럽 각지를 장기간 떠돌다가 1898년 스위스에서 한 무정부주의자의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났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자 가장 고귀한 신분이었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사랑도 자식도 모두 잃어버린 비운의 여인이 되어 생애를 마감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비명에 목숨을 잃은 지 꼭 100년 만인 1997년, 20세기의 신데렐라 다이애나비는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궁을 벗어나 유럽을 떠돌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쳤다. 각기 19세기와 20세기 최고의 신데렐라이자 대중의 우상이었던 두 ‘공주’가 이처럼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치게 된 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글·전원경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연희 | 사진·김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