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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컬쳐

난(蘭)이 군자가 된 사연을 아십니까?

by 하나은행 2014. 9. 24.
Hana 컬쳐

난(蘭)이 군자가 된 사연을 아십니까?

by 하나은행 2014. 9. 24.

‘묵란도(墨蘭圖)’ [사군자 8폭 병풍] 중, 강세황, 종이에 수묵, 68.9×48.3cm, 부산 개인 소장 바람이 지나간 것일까? 바람결에 난잎이 살랑 흔들리면서 아름다운 난 향기가 화면 밖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심리학 용어 중에 ‘미켈란젤로 동기(Michelangelo Motive)’라는 말이 있다. 1508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천지창조>를 그릴 때의 일이다. 무려 4년 동안이나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거의 누운 자세로 천장 구석구석까지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켈란젤로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여보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까지 뭘 그렇게 정성 들여 그리나? 누가 그걸 알아준다고!” 그 말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야 내가 알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노력한 결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며 인정받지 못했을 때 서운함을 느낀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 때문에 ‘미켈란젤로 동기’라는 용어까지 생기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처럼 타인의 인정에 관계없이 자신의 내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숭고한 태도를 지닌 사람을 동양에서는 ‘군자(君子)’라고 한다. 

미켈란젤로보다 무려 2,000년 전에 살았던 공자(孔子)는 군자적 삶의 자세를 견지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였던 공자는 자신의 이상과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적 경륜을 펼치고자 여러 나라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출발해 14년 동안 수많은 나라를 방문했지만, 단 한 군데서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도 오랜 시간 천하를 주유하며 겪은 거절의 경험들이 마음의 상처로 남았던 듯하다. 

공자의 가르침을 적은 《논어》에서 군자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장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學而>)라는 걸로 미루어 그렇게 짐작된다.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말라’는 취지의 이 말은 두말할 필요 없이 공자의 아픈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인간적인 연민마저 느끼게 된다.

결국 공자는 정치에 대한 꿈을 접은 채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름에 젖어 고향을 향하던 공자는 인적 없는 산속을 지나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꽃향기를 맡게 된다. 뜻밖에 맡게 된 고결한 향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수레에서 내려 향기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잡초 덤불 사이에서 아름다운 난(蘭)이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자는 보아주는 사람이 없음에도 묵묵히 향기를 발산하는 난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고결한 태도를 잃지 않는 군자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탄복한다.

이후 난은 알아주는 이 없어도 지조를 굽히지 않는 군자의 상징이 되었고, 난향(蘭香)은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었다. 이것이 난이라는 식물에 최고의 인격적 존재인 ‘군자’라는 호칭이 붙게 된 사연이다. 훗날 난은 역시 군자적 의미를 지니는 대나무, 매화, 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라 불리게 된다. 군자적 삶을 지향했던 옛 선비들은 고결한 인품을 가꾸는 방편으로 난을 키우고 감상하며 그림으로 그렸다.

김홍도의 스승으로 유명한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수준 높은 학문의 세계와 예술적 안목을 갖춘 이답게 간결하고 담백한 필치의 <묵란도>를 그렸다. 그의 난 그림을 보면, 기본에 충실한 정갈한 구도에 지나치게 빠르지도 않고 기교를 부리지도 않은 난 잎의 선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있다. 그 사이로 몇 개의 꽃들이 담담하고 소박하게 피어 있다. 한 자락 부드러운 바람이 살며시 지나간 듯, 단아하면서도 격조를 살린 그의 묵란화를 보노라면 그윽한 난향이 풍기는 것 같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난과 같은 고결한 인품을 유지했던 강세황의 삶을 염두에 둔다면, 이 그림은 그의 자화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국향군자(國香君子)’ [난맹첩] 중, 김정희, 종이에 수묵, 22.9×27cm, 간송미술관 “이것이 국향이고 군자다(此國香也君子也)”라고 쓴 화제의 글씨와 서투른 듯한 묵란의 표현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빼어난 기교는 오히려 서툰듯하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가 이런 것이 아닐까?

 

강세황이 사군자나 인물화를 망라해 여러 분야의 그림에 뛰어난 반면,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난 그림으로 가장 이름을 떨쳤다. 추사체와 더불어 묵란이야말로 그의 예술적 성과를 대변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김정희 자신의 회화 이념을 밝힌 글도 반 이상이 묵란과 관련된 내용이어서 명실공히 묵란의 대가라 할 만하다.

제주도 유배 시절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을 치는 법은 예서(隷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을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식을 가장 꺼리니 만약 한 붓이라도 화법(畫法)이 있다면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 난을 잘 치기 위해서는 풍부한 학식과 높은 정신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절대 그림 그리는 법으로는 그리지 말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 난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다름 아닌 ‘예서’ 쓰는 법으로 묵란을 그리라고 한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김정희만의 독특한 묵란화론이다. 그는 묵란을 그림이라기보다 글씨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법에 가치를 둔 김정희의 묵란화론은 강세황이 그림으로서의 조화를 중시해 <묵란도>를 그린 점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예서체로 쓴 화제(畵題: 그림의 제목과 여백에 적힌 글)가 졸박한 멋을 보여주는 김정희의 <국향군자(國香君子)>는 난도 그런 글씨체로 그려 서투른 듯 파격적이다. 무엇보다 두 줄기 난 잎이 서로 교차하며 시원스레 뻗어가 화면을 가르는 구성이 무척 독특하다. 게다가 그 아래에 핀 꽃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마치 ‘나라에서 제일가는 향기(國香)이고 군자’라는 듯 당당한 모습이다. 이런 개성 넘치는 묵란화의 멋은 아무나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불교와 경학에 정통하고 추사체를 창안할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분이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이 <국향군자>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난맹첩》에 들어 있는데, 제주도로 유배 가기 전인 1836년(51세) 무렵에 그린 것이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김정희, 종이에 수묵, 55×31.1cm, 서울 개인 소장 난의 표현도 독특하지만 여백에 추사체로 적은 화제가 더 눈길을 끈다. 왼편 아래쪽에는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只可有一 不可有二)”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다시는 이와 같은 경지의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김정희의 자부심과 희열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우리 미술사에서 묵란화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가 탄생한다. <불이선란도>는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후 말년에 그린 것인데 강세황의 <묵란도>에서 볼 수 있는 난 그림의 기본 구성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래도 <국향군자>에서는 난의 기본 필획이나 형상이 어느 정도 살아 있었는데 말이다.

난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지 엄밀하게 따지면 이건 난이 아니다. 이런 난이 세상에 어디 있나? 엷은 먹으로 스치듯 한쪽으로 그어 나간 난 잎들은 얼핏 봐서는 바람에 날리는 풀과 같다.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불이선란도>는 난이라는 식물의 외향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난의 본성을 그린 것이다. 그것도 우연히. 말하자면 이 그림은 구상이 아니라 추상이다. 게다가 독특한 추사체로 여백을 가득 메운 화제는 그림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해 그림이 중심인지 글씨가 중심인지 모호할 정도다.

하지만 다소 긴 화제 덕분에 그림이 탄생하게 된 연유를 알 수 있어 다행이다. 왼쪽에서 시작되는 화제를 보면 “부작난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이라고 적혀 있다. 20여 년간이나 난을 그리지 않다가 붓 가는 대로 그렸더니, 우연히 난의 천성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흡사 선불교 수행 중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나오는 오도송(悟道頌) 같다. 경계를 넘어서버린 자유의 경지인것이다. 

성경에 있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는 구절처럼, 진리를 알고 나서 대상의 구체적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한 그런 느낌이다. 이런 그림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감상하라고 그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 쪽에 있는 화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초서와 예서 쓰는 법으로 그렸으니, 사람들이 어찌 알며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以艸隷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이 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동의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자만에 가까운 자부심에 충만한 말투다. 나는 이런 그의 태도가 좋다. 부럽기까지 하다. 스스로에 대한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동의나 인정이 없어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불이선란도>가 제작된 시기는 대략 1855년(70세)무렵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와 북청 유배에서 돌아온 후, 과천에서 은거하던 말년에 해당된다. 그야말로 남이 알아주기는커녕 잊히다시피 한 시절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의미심장하다. 강세황과 마찬가지로 김정희 역시 남이 알아주지 않던 시기에, 난 그림과 함께하며 군자의 덕목을 지키려 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림과 삶이 이토록 밀접할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탄복하게 된다.

주변을 돌아보면 미켈란젤로나 김정희 같은 분들과 달리, 남의 인정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 칭찬 한마디에 바람 잔뜩 들어간 풍선처럼 우쭐대다가, 인정받지 못하면 곧바로 바람 빠진 풍선같이 되는 이가 허다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남이 나를 알아주고 말고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만큼 내가 남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할까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學而>)



글·김정숙 | 진행·이소진 | 디자인·김기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