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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피플

뜻밖의 일상이 예술이 되다. 일상의 순간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박진아 작가

by 하나은행 2014. 10. 8.
Hana 피플

뜻밖의 일상이 예술이 되다. 일상의 순간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박진아 작가

by 하나은행 2014. 10. 8.

박진아 작가의 그림에 특별한 드라마는 없다. 다만 평범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과 긴 시간의 공존,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의 정체성 등 역설적 가치가 혼재하는 그녀의 작품 속에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해석의 재해석을 이끄는 묘한 매력이 배어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밋밋하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컬러, 네온 그레이처럼.

 

 

박진아 작가는 1974년생으로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런던 첼시 칼리지에서 파 인 아트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0년 성곡미술관 <스냅 라이프>, 2012년 원앤제이갤러리 등을 비롯해 지난 8월에 초에 막 을 내린 <네온 그레이 터미널>까지 여섯 차례의 개인전과 20회가 넘는 국내외 단체전을 열었다. 2009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2010년 회화 작가로는 최초로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후보로 선정됐다.

Q. 얼마 전에 개인전을 마치셨죠. 그간 일상 속의 모습들을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이번 전시 ‘네온 그레이 터미널(Neon Grey Terminal)’에서는 공항에서의 여러 모습을 담았던데, 공항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최근 몇 년 사이 개인적인 이유로 공항을 자주 찾게 됐어요. 지인을 마중하러 갈 일도 종종 있었고요. 보통 비행기 출발 시간보다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하다 보니 오랜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야 하잖아요. 비행기든 사람이든 기다리는 시간에 카메라 셔터를 눌렀어요(박진아 작가는 그림 작업을 위한 중간 매체로 사진을 활용하고 있다). 공항이 어떠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통과하는 통로이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간 공간이라는 점이 흥미롭고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렇게 습작과 첫 작품 <짐 포장>을 완성했을 때 하이트 컬렉션에서 개인전을 제의했어요. 갤러리 공간을 보니 제 공항 그림이 전시장과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예 공항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작품에 몰두했어요. 2013년 중반부터 1년간 공항만 그렸어요.

 

 

Q. 공항을 떠올리면 여행의 설렘과 긴장이 뒤섞이는 곳, 때로는 재회의 기쁨, 때로는 헤어지는 아쉬움과 슬픔 등의 감정이 부유하는 곳이라 생각되는데요. ‘네온 그레이 터미널’에서는 그런 감정들이 잘 보이지 않아요.
A. 감정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거리를 두고 보는 시각이 훨씬 저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이것이 무엇’이라고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보다는 보는 사람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요. 사람들이 제 그림을 어떻게 읽고 보는가가 재밌는 거잖아요. 전시를 하며 들어보니 사람마다 공항이라는 공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들이 다채롭더라고요. 그저 설렌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피곤하고 불쾌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요. 사실 공항을 스케치한 제 사진 속에서 드라마틱한 장면은 없어요. 설사 찍었더라도 캔버스에 옮겼을까 싶어요. 그림에 담긴 뜻을 알리기보다 던져놓고 해석되길 원하니까요. 타고난 취향인 것 같아요.

 

 

Q. ‘네온 그레이 터미널’이라는 전시 제목이 독특하게 다가왔어요. 실제로 네온 그레이라는 색이 있나 찾아보기도 했는데 없더라고요. 네온 그레이 컬러를 품은 공항, 네온 그레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A. 전시 제목을 정할 때 회색 또는 그레이라는 단어를 넣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공항은 회색투성이 거든요. 대부분 공항 바닥이나 벽, 기둥들이 회색 일색이죠.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분이었는데 사실 제게 쉽지 않았어요. 인공조명과 네온사인이 많은 공항의 회색은 여러 가지 색이 섞이면서 내는 회색이었어요. 특히 회색 바닥에는 비치는 요소들이 많았고요. 그것을 표현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공항에 대한 하나의 특징으로, 공항을 대변하는 색으로 그레이만 키워드로 잡았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그레이라는 단어를 우울하게만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적이고 중성적인 그레이의 특징을 살리되 우울함을 상쇄하고자 네온이라는 단어를 더해 제가 받은 공항 느낌을 표현한 거예요. 앞서 말했듯이 실제로 공항에 네온사인도 많고요.

 

 

‘매끄러운 바닥’, oil on canvas, 110×110cm, 2014

Q. 이번 작품들에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바닥, 사람과 사물 등이 반사되어 보이는 바닥이에요. 화면의 대부분을 바닥에 내주고 있는데, 이 미끈한 바닥이 참 아름답게 보여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나요?
A.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리다 보니 공항 바닥에 많은 것들이 비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바닥을 표현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인물보다 바닥에 더욱 공을 들였죠. <활주로가 보이는 창>이라는 작품에서는 바닥이 반 이상을 차지하게 일부러 구도를 잡았고, 채색으로만 된 추상화 작품 제목은 <매끄러운 바닥>이죠.
 

 

Q. 공항의 밤 시간을 그린 연작이 있어요. 낮 시간의 공항과는 사뭇 다른 터치가 엿보이는데 매끄럽던 바닥이 일렁인다고 할까요?

A. 밤 공항에는 고즈넉한 적막감이 있어요. 캐리어를 끌고 바쁘게 오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간간이 눈에 띄는 사람들, 여전히 조명은 켜져 있지만 자연광은 완전히 사라지고 네온은 더 강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죠. 거기에서 오는 특유의 고요함이 좋았는데 그런 느낌이 바닥에 투영된 것 같아요. 그림이 쓸쓸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쓸쓸함을 부정적으로 느낀 것은 아니고 담담하게 풀어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에요. 원래 페인팅 자체가 혼자 작업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키오스크’, oil on canvas, 130×194cm, 2013

 

Q. 독특한 구도와 갑자기 찍힌 스냅사진 같은 화면이 특징인데 초기 작품부터 로모 카메라에 주변과 지인들의 실제 모습을 촬영한 후 이를 두 개나 네 개의 캔버스에 분할해서 재구성했죠. 사진 작업을 위한 중간 매체로 활용하는 이러한 발상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A. 사진은 이미 동시대 회화에 깊숙이 침투해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 같아요. 순간적으로 순간을 포착하기 편리한 도구잖아요. 제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그리는데 그런 일상을 기록하기 제일 쉬운 방법이죠. 또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을 사진을 통해 보게 되기도 해요. 중심된 피사체의 뒤에 있는 사람의 포즈라든가, 어떤 것을 하고 있는 중간의 애매모호한 동작 등 아주 평범해서 또는 중요하지 않아서 안보게 되는 그런 동작들을 발견하고 캔버스에 재현하기 쉽죠. 우연히 찍힌 것도 많고 그런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활주로가 보이는 창’, oil on canvas, 170×240cm, 2014

 

Q. 작품의 상을 그릴 때, 사진을 촬영하기 전부터 구상에 들어가나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촬영한 것들 중에서 선택해 작품에 적용하나요?
A. 사진 촬영은 제 일상이에요. 무의식적으로 계속 촬영해요. 그중에서 우연한 순간을 포착한 것을 그리죠. 스냅사진을 재구성하는 거예요. 스냅 사진이란 말을 굳이 사용하는 것은 연출한 사진이 아니라는 거예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동작을 원하기 때문에 피사체가 모르게 찍히길 원해요. 무작위로 촬영한 사진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골라내요. 하나의 사진이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경우보다는 대부분 몇 장의 사진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켜요. 일종의 콜라주처럼. 같은 장소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제가 원하는 구성으로 조합해요.

 

 

‘J구역’, oil on canvas, 162×135cm, 2014

 

 Q. 작품을 보면 화면 밖으로 잘린 인물, 사물들이 있어요. 화면 밖으로 인물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다분히 의도적인 구성이겠죠?

A. 사진의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만 동시에 그림에서는 구도의 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요소들을 배치하죠. 제 그림에는 가운데를 비어놓는 경우가 많아요. 가운데 주인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게 구성해요. 그렇게 하는 것이 힘이 골고루 나눠져 균형 있고, 캔버스 바깥 공간까지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잖아요. 저만의 특성은 아니에요. 아마 사진가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일 거예요.

 

 

 

Q. 특유의 캔버스 위를 여러 번 지나간 붓 흔적들은 대상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어요. 그리고 붓질이 쌓이면서 만든 색과 톤은 대상을 더욱 객관화하는 것 같아요. 이는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실현하기 위함인가요?
A. 시간의 연속성과 찰나의 순간, 두 가지 모두 표현하고 싶어서예요. 순간을 그리지만 이 순간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장면처럼 보이고 싶지 않고 다음 순간도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약간은 풀어진 붓질로 겹치게 많이 올리며 작업해요. 감을 주기 위해 설명하자면 50층을 쌓는다고 할까요. 유화의 특성상 반투명 그림이 쉽잖아요. 여러 번의 붓질로 여러 가지 색이 겹쳐져 나오는, 정확히 무슨 색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색들이 발현되는 것도 매력적이에요.
 

‘밤 공항 01’, oil on canvas, 31×38cm, 2014

 

 

Q. 기술의 발전은 분야 간의 넘나들기를 가능하게 하고 있어요. 작가님이 사진을 매개체로 작업하시는 거나, 이번 전시에서 독일 작곡가 ‘페터 간(Peter Gahn)’과 함께 공감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사운드 협업을 진행하신 것을 봐도 그렇고요.
A. 융합이나 협업을 중점에 두고 작업하는 편은 아니에요. 회화와 사진을 함께 사용한다거나 작곡가와 협업한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어요.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중에서 편리한 것을 찾았어요. 효과적인 작품 활동을 위한 일종의 실험 같은 거예요. 페터 간과 협업한 작품은 <매끄러운 바닥>이에요. 이미지를 다 들어내고 회색으로만 채색한 추상화죠. 사운드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좀 비켜줬어요. 작곡가나 연주자 등 다른 장르의 예술가와 협업하는 시도를 계속해볼 생각은 있어요. 최근에는 현대무용에 관심이 생겨 무용 리허설하는 장면을 습작해보기도 했어요. 항상 일상적인 포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의식 하지 못한 상태의 행동들을 주로 그렸기 때문에 무용가의 동작은 제게는 나름대로 파격적인 시도였어요. 무용 동작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목적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동작이라 그것을 그림으로 계속 그려나갈지는 고민하고 있어요.

 

 

‘그림을 바라보는 네 여자’, oil on canvas, 230×178cm, 2010

 

Q. 2010년 작업들 <그림을 바라보는 네 여자> <프로젝터 테스트> 등을 살펴보면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의 공간과 이에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해요. 작가님 자신을 둘러싼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과 모습들인데 갤러리라는 공간과 협업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제게는 그야말로 아주 평범한 일상이었어요. 그전에는 노는 모습을 그렸는데, 일하는 것으로 넘어가면서 갤러리와 전시 준비하는 모습이 들어간 거죠. 성곡미술관 전시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데, 실제 그 공간과 연결된 가장 전형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 그림 크기도 많이 커졌고, 사람들이 관람하면서 ‘그림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처럼 느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Q. 큐레이터나 설치 스태프들, 관객이 주인공이 되는 그림은 주객이 전도 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관찰자 시점에서 그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림 속의 그림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A. 제 특정한 감정을 담거나 정확한 표현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러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했어요. 또 미술관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공간 자체에 관심도 많아졌고요. 공간이 더 중요하다 보니 공간감을 주기 위해 사람의 전신을 그려 넣었고 거리도 더 생기게 됐어요. 그림 속 그림들은 원래 그 공간에 있던 그림들이에요. 비슷하게 그리면서 아주 단순하게 표현했죠. 고낙범 선생님의 <나팔꽃> 시리즈 작품이 있었는데 파란색 동그라미, 보라색 동그라미로 쓰윽 한 붓으로 그렸는데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나네요.
 

‘짐 포장 02’, oil on paper, 145.5×218cm, 2013

 

‘굿바이’, oil on canvas, 54×154cm, 2012

 

Q. 지난 2012년 전시 <one and one> 작품들은 동일 인물이 두 번씩 등장해요. 같은 인물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두 인물의 화면상 병치는 신선했어요. 반면 현대 구상화에서 거의 전례를 찾을 수 없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평가도 있었고요.
A. 여러 장의 사진을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하는 제 작업 특성상 이 인물을 저기서 가져오고, 저 인물을 여기서 가져오는 작업을 하다가 같은 인물을 두 번 가져온 거예요. 동일 인물이 두 번 들어가면 시간의 흐름과 운동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잖아요. 같은 사람이 두 번 등장하면 안 될 게 무엇 있겠나 싶어 시도한 거죠. 디지털 시대로 넘어온 다음부터는 이미지 복사가 쉽고, 영화나 광고에서도 자연스럽게 등장하잖아요. 그 맥락에서 보면 어색할 게 없다고 생각해요.

 

‘파리의 관광객’, oil on canvas, 88×130cm, 2012

 

‘지하실에서 준비’, oil on canvas, 162×227cm, 2012

 

Q.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가까운 시일에 그룹전 3곳에 참여해요. 갤러리 정미소의 <Reality on the Reality>, 아르코 미술관의 <역병의 해 일지>, OCI 미술관의 <시대의 눈-회화>전입니다. 개인전은 작품이 더 쌓인 다음인 내후년 정도에 해보고 싶어요. 앞으로도 사진을 활용한 회화를 그릴 생각이에요. 익숙하고 원하는 요소가 있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해요.

 

글·윤연숙 | 디자인·김재석 | 인물 사진·한상무 | 도움·원앤제이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