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새벽을 그리다. 그림으로 본 새벽의 전경들
행여 일출을 못 볼까 노심초사하여, 새도록 자지 못하고, 가끔 영재를 불러 사공다려 물으라 하니, “내일은 일출을 쾌히 보시리라 한다” 하되, 마음에 믿기지 아니하여 초초하였다. 먼 데 닭이 울며 계속해서 날 새기를 재촉하기에, 기생과 여자 노비를 혼동하여 어서 일어나라 하니, 밖에 급창이 와, “관청 감관이 다 아직은 너무 일러 못 떠나시리라 한다” 하되 곧이 아니 듣고, 다급히 재촉하여 떡국을 쑤었으되 아니 먹고, 바삐 귀경대에 올랐다.
순조 32(1832)년에 의유당 남씨가 쓴 《동명일기(東溟日記)》의 부분이다. 새벽녘 일출을 보겠다는 기대로 잠도 자지 않고 동행한 이들을 재촉하는 여인의 들뜬 마음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동틀 무렵의 새벽은 무척이나 짧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칠까 조바심에 안달하는 정황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 흡사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의유당 남씨에게 새벽은 기필코 일출을 보리라는 각오와 설렘으로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의유당뿐이랴. 우리도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앞두고 잠을 설친 채 일찍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동이 터오는 새벽은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무엇이든 이룰 것 같은 용기를 주기도 한다.
예술가들에게도 새벽은 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창조성을 일깨워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는 24세 되던 189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50년간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떠오르는 단상과 잠언들을 노트에 기록했다.
이 기록은 후에 《노트(Cahier)》라는 제목의 29권으로 된 책으로 출간됐다. 3만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도 놀랍지만, 지금도 학자들이 연구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니, 새벽 노트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아가 새벽은 묵상과 기도로서 삶의 지혜를 얻는 신성한 시간이기도 하다. 성경에 나오는 목동 다윗은 새벽 기도로 용기와 지혜를 얻어,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자를 죽이는 무적의 소년이 되었고,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승리비결은 바로 새벽 기도였다. 이처럼 동틀 무렵의 새벽은 짧지만 수만 가지의 얼굴을 가진 시간이다.
시인들은 새벽을 소재로 다양한 형식의 시를 쓰기도 하고, 의미를 확장해 새 시대를 상징하는 시간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만큼 가치 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새벽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문학에 비해, 우리 전통 미술에서 새벽을 그린 그림은 드물다. 그 이유는 수묵이라는 재료의 한계와 하늘을 칠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두는 동양화의 전통으로, 새벽의 미묘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옛사람들은 변화하는 빛을 추구하기보다 변치 않는 고유한 본질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새벽 특유의 빛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중국을 통해 서양 화법이 들어오면서 마침내 새벽을 묘사한 그림이 등장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중인 화가 강희언(姜熙彦, 1738~1784 이전)이 그린 <북궐조무도(北闕朝霧圖)>가 그것이다.
‘경복궁의 새벽안개’라는 뜻의 <북궐조무도>는 새벽녘 안개에 싸인 광화문 거리를 원근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원근법이란 사물이 뒤로 갈수록 좁아 보이는 현상을 그린 투시 화법으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화면에 담는 서양화의 공간 표현법을 말한다. 우리 전통 미술에서는 실제로는 좁아지지 않음에도 좁아 보이는 착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오히려 뒤쪽을 넓게 표현하는 ‘역원근법’을 사용했다. 이런 회화적 전통을 염두에 둔다면, 수묵 산수화에 서양식 원근법을 적용한 <북궐조무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이 그림의 오른쪽에는 “(화가가) 새벽녘에 시간을 기다리다가 신발에서리가 가득하게 되었다니, 내 어찌 이 그림의 묘미를 알 수 있으리오”라고 적은 강세황의 평이 있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스승으로 당시 예술계를 이끌었던 분이다. 그의 글로 미루어 강희언이 안개 자욱한 광화문의 새벽 정경을 표현하기 위해, 마치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처럼 이른 시간 실재 장소에 나가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모름지기 예술이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다양한 실험 정신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조선 후기 새롭게 유입된 서양 화법을 접한 강희언은, 특유의 호기심으로 그것을 조선 상황에 맞게 그려내고 싶어 했고, 그 욕구를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그의 그림들은 조선 후기 화단에 신선한 충격이자, 이후 뛰어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강희언이 원근법으로 안개에 싸인 경복궁의 새벽 광경을 그린 이래, 경복궁의 새벽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에 활동한 안중식은 <백악춘효(白岳春曉)>에서 동양화 기법으로 안개를 표현해, 새벽녘에 본 경복궁과 광화문의 장엄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안중식이 55세 되던 해인 1915년에 그린 <백악춘효>는 수묵과 채색이 조화를 이루는 안중식 특유의 화풍이 잘 나타나 있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은 수묵의 미점(米點)으로 부드럽게 처리한 반면, 나무 표현에서는 색채가 진한 청록산수화풍이 강하게 나타난다. 동시에 서양식 원근법도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안중식의 <백악춘효>는 두 폭이 전해진다. ‘백악의 봄 새벽’이라는 제목과 달리, 한 폭은 1915년 여름에 그려졌고, 다른 한 폭은 같은 해 가을에 그려졌다. 구도는 광화문을 향한 시선의 방향만 약간 다를 뿐 두 그림이 거의 흡사하다. 그렇다면 안중식은 두 번이나 <백악춘효>를 그리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에게 있어 백악의 봄날 새벽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안중식은 <백악춘효>에서 백악산과 경복궁을 실제에 가깝게 충실히 묘사했다. 백악산 기슭에 있는 바위벽이나 산성은 물론 궁궐의 지붕과 처마 또한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1915년 당시의 경복궁 모습은 아니다. 실제로 이 그림을 그릴 무렵, 경복궁 모습은 너무나도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일제의 탄압 아래 박람회용 건물을 짓기 위해 파괴되고 있었다.
더구나 경복궁을 둘러싼 성벽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무너져 내리는 곳이 많았다. 파괴되고 무너지는 경복궁 모습은 흡사 퇴락의 길을 걷는 조선 왕조의 모습과도 같았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 건립과 함께 창건된 조선의 정궁(正宮)으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추다’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신성한 공간의 질서가 일제에 의해 무너지고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며 왕실과 백성의 가슴도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이렇듯 스러져가는 우리 궁궐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 조선 왕가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서는 안중식에게 경복궁의 원래 모습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안중식은 안타깝게 남아 있던 현장의 모습 위에 사진과 궁중 기록을 참고해 옛날 질서정연했던 경복궁과 광화문의 위용을 되살려냈다.
안중식은 국망의 상황에서 이왕직의 요청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백악춘효> 여름본을 완성한 후, 곧이어 그해 가을에 ‘백악의 봄 새벽’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또 한 점의 <백악춘효>를 그렸다. 특히 가을에 제작된 그림에서는 광화문의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과 바로 위에 있는 여섯 개의 누혈(漏穴: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은 돌)과 벽돌의 개수까지 정확하게 세어서 그렸다. 그는 조선 왕실의 마지막 화원으로서 자신의 모든 기량을 동원해 절박한 심정으로 그림에 임했을 터이다.
하나의 점을 찍고 하나의 선을 그을 때마다 광복의 동이 터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붓 끝에 담았을 것이다. 안중식이 정성을 다해 그린 <백악춘효>를 보면, 그림 속 새벽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순간일지 짐작하게 된다. 결국 ‘백악의 봄 새벽’은 진정으로 나라의 광복을 바라는 깊고도 절실한 의미를 지닌 시간임을 알 수 있다. 안중식은 이 그림을 그린 4년 뒤인 1919년, 3.1 운동과 관련되어 내란죄라는 죄명 아래 옥살이를 하다 59세로 생을 마감했다.
올해는 <백악춘효>가 그려진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또 안중식이 ‘백악의 봄 새벽’으로 상징했던 ‘광복’을 맞은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광복 후, 참혹한 전쟁을 치른 아픔을 극복하고 엄청나게 발전했다. 한국의 10년은 다른 나라의 100년보다 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열심히 달려왔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와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진하듯, 고속 성장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다. 이제는 무조건 앞만 보며 달릴 것이 아니라 ‘속도보다 깊이’를 향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물질보다 정신’에 가치를 둔다면 더 좋겠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우리 선조로부터 이어져온 타인에 대한 정(情)과 격조 있는 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의 힘을 키워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가능하리라 믿는다. 의유당 남씨가 일출을 보려는 기대로 기쁨 가득한 새벽을 맞이하듯, 2015년 대한민국의 봄날 새벽 또한 새로운 희망으로 설렌다.
글·김정숙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기성
글을 쓴 김정숙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화 연구’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그림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감동을 학생들과 나누고 싶어 고려대학교에서 전통 미술감상법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그림을 통해 발견한 통찰을 모아 《옛 그림 속 여백을 걷다》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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