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na 컬쳐

예술가의 술, 압생트 : 19세기 예술가들이 사랑한 초록 요정

by 하나은행 2014. 5. 14.
Hana 컬쳐

예술가의 술, 압생트 : 19세기 예술가들이 사랑한 초록 요정

by 하나은행 2014. 5. 14.

19세기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의 뒷골목, 오후 5시경이면 어김없이 예술가들의 아지트에선 압생트의 향연이 벌어졌습니다. 고흐, 르누아르, 드가, 피카소 등 당시 가난했던 화가들은 싸구려 술집에서 압생트를 마시며 하루의 시름을 떨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고뇌하며 취해갔습니다. 때론 에메랄드 빛 술 한 잔에서 영감을 얻거나 낭만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압생트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애정의 대상이었습니다.

 

압생트, 독해서 지독하게 매력적인 술

압생트는 은은한 초록빛을 지녀 ‘초록 요정’이라 불리며 19세기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술이자, 강력한 환각과 중독성으로 ‘악마의 술’이라 불리며 한때 전 세계적으로 금지되었던 술이기도 합니다. 압생트라는 이름은 향쑥(Wormwood)의 라틴명인 압신티움(Artemisia Absinthium)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름처럼 쑥을 주원료로 살구씨, 회향, 아니스 등을 향료로 만든 술입니다. 이 술은 알코올 함유량이 70%가 넘을 만큼 독하기 때문에 마시려면 독특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압생트를 따른 술잔위에 압생트스푼(구멍이뚫린긴숟가락)을 걸쳐놓고 각설탕을 올린 후 천천히 물을 부어 설탕을 녹이면서 물과 함께 희석(보통 1:1)해 마시는 것입니다. 설탕과 물을 넣으면 초록색이던 압생트는 하얗게 변하고, 쌉싸래한 술과 달콤한 설탕이 어우러져 절묘한 여운을 전해준다고 합니다. 압생트는 위스키와 같은 비싼 술을 마시기 어려웠던 19~20세기 화가, 시인, 소설가 등 가난한 예술가들 에게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랭보,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 로트레크, 드가 같은 당대의 예술가들은 압생트에 취한 채 예술을 논했습니다. 독특한 향미와 저렴한 가격, 그리고 많이 마실경우 환각상태에 빠져들게해 고된 현실에 지치고 예술적 영감을 얻고 싶은 이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잊게 하는 동시에 예술혼을 불태워주는 일종의 만병통치약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압생트에 중독되 면신경손상,환각,환청,분노,발작등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반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압생트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또 그가 유독 노란색을 많이 사용한 것도 압생트 중독에 의해 시신경이 손상되어 사물을 노랗게 보는 황시증(黃視症)을 앓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종의 환각제로 건강에 해롭다고 여겨진 압생트는 1908년 스위스를 시작으로 1915년 프랑스 그리고 점차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1981년 유럽공동체(EC)가 압생트 합법화 결정을 내리면서 다시 제조, 판매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재는 환각 성분을 제거하고 알코올 함유량을 낮춘 200여 개 브랜드의 압생트가 생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세기 말 세기 초 혼돈의 시대를 살던 예술가들에게 압생트는 뿌리칠 수 없는 위로였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정신과 마음이 담긴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술가의 삶 속에 스며든 초록요정

압생트는 수많은 화가와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합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Absinthe Drinker)’ 이라는 제목의 그림도 제법 많습니다. 널찍한 카페에서 왼손은 머리를 감싸고 주먹 쥔 오른손은 뺨에 댄채 살짝 찌푸린 얼굴을 한 남성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초록요정이 모습을 드러낸 그림의 제목 또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입니다. 체코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겸 화가였던 빅토르 올리바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19세기의 압생트를 마시면 초록 요정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게 합니다.

고흐는 압생트를 마신 뒤 초록요정을 보았다고 합니다. 사실 반고흐가 압생트에 매혹된 건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이 컸습니다. 고흐와 로트레크는 마주 앉아 압생트를 마시며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로트레크가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을 보면 고흐의 화풍을 닮았는데 이는 당시 고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흐는 로트레크와 몽마르트르의 한 화실에서 처음 만난 이후 친분을 이어갔습니다. 로트레크는 천재적이었지만 생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가난했던 고흐를 경제적으로 후원해주었습니다.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돈 걱정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몽마르트르의 다른 화가들과 달리 로트레크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백작 작위의 아버지와 서로 사촌이었던 어머니에게서 귀족의 혈통과 재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근친혼의 영향으로 유전병 또한 물려받았습니다.

특히 뼈가 많이 약했던 그는 열네 살에 허벅지 뼈가 부러진 뒤 하반신 성장이 멈추고 말았습니다. 귀족 가문이었지만 장애를 안고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던 로트레크가 압생트에 빠진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로트레크는 매일 밤 물랭 루주(1889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번화가 클리시 거리에 개장한 댄스 홀)를 드나들며 그곳의 화려한 풍경, 무희, 종업원 등을 즐겨 그렸습니다. 테이블 위에 압생트 한 병과 술잔을 올려놓은 채 복잡 미묘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은 물랭 루주의 종업원이자 많 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델로 활동했던 수잔 발라동입니다. 나중에 로트레크의 도움으로 화가로 변신 했지만, 어린 나이에 사생아를 낳고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녀 역시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들인 풍경화가 모리스 위트릴로는 열 살 때부터 압생트에 중독되었다고 하니 당시 압생트가 고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예술가들의 삶 속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파고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가의 술에서 서민의 술로

1. ‘The Hangover (The Drinker, Suzanne Valadon)’, Henri de Toulouse-Lautrec, oil on canvas, 45.1×53.3cm, 1889,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Art Museum, USA 2. ‘The Absinthe Drinker’, Viktor Oliva, 1901, The Original Painting can be Found in the Cafe Slavia in Praguev
1. ‘The Hangover (The Drinker, Suzanne Valadon)’, Henri de Toulouse-Lautrec, oil on canvas, 45.1×53.3cm, 1889,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Art Museum, USA 2. ‘The Absinthe Drinker’, Viktor Oliva, 1901, The Original Painting can be Found in the Cafe Slavia in Praguev

한 쌍의 남녀가 보입니다. 여자는 압생트가 담긴 잔을 앞에 놓고 초점을 잃은 허망한 시선으로 앉아 있습니다.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냉담한 시선으로 여자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어 일행인 듯 보이지만 무슨 사연인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에드가 드가의 <압생트 마시는 사람>입니다. 모델은 드가의 친구들이었던 동판화가 마르셀린 데스부탱과 여배우 엘렌 앙드레입니다.

드가 특유의 독특한 구도를 보여주는 이 그림은 우연히 포착된 스냅 사진같이 현실감을 주나, 모델이 모두 오른쪽에 치우쳐 있고 남자는 모습을 다 알아볼 수 없도록 일부분이 잘려져 있는데, 모델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비스듬한 원근감은 불안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19세기 파리는 산업화와 사회 발전으로 새롭게 부를 축적한 중상류층이 생기고 이로 말미암아 소비문화와 여가를 즐기는 풍조가 넓게 확산됐습니다.

 

3. ‘The Absinthe Drinker’, Edgar Degas, oil on canvas, 92×68cm, 1876, Musee d'Orsay, Paris 4. ‘The Absinthe Drinkers’, Jean Francois Raffaelli, oil on canvas, 107.9×107.9cm, 1881,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co, California
3. ‘The Absinthe Drinker’, Edgar Degas, oil on canvas, 92×68cm, 1876, Musee d'Orsay, Paris 4. ‘The Absinthe Drinkers’, Jean Francois Raffaelli, oil on canvas, 107.9×107.9cm, 1881,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co, California

반면 농민은 가난했고 노동자는 고단했으며 하층민의 삶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드가의 그림은 파리 하층민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 허무하고 허탈한 그들의 심리를 그대로 표현한 듯합니다. 환각 성분이 들어 있는 녹색의 독한 술 압생트만이 이들의 처지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 압생트는 알코올 함량이 높고 향미가 독특해 주로 아페리티프(Aperitif;식전주)로 사용되며 예술가, 부르주아, 고급 창녀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으로 19세기 말에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술이 되었습니다. 압생트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의 초상화가이자 풍경화가로 유명했던 장 프랑소와 라파엘리의 작품입니다. 허름한 옷차림과 다 떨어진 신발이 이들의 삶이 팍팍하고 풍족하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워 보이는 표정의 두 남자 역시 마주 보지 않고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었거나, 가족의 끼니를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두 남자를 위로해주는 것은 압생트 한 병뿐입니다. 격변의 시대, 가난한 예술가 의 술이자 서민의 술로 지난한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져준 것은 오직 압생트 한 병뿐이었습니다.


글·윤연숙 | 디자인·김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