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작가 롭 윈느(Rob Wynne)의 뉴욕 스튜디오, 시가 흐르는 거울에 머문 시선
‘I almost remember(나는 거의 기억하지)’ ‘probably definitely(아마도 분명히)’ 입 속에서 굴릴수록 여러 맛이 나는 문장들이 벽면을 타고 흐른다. 액체가 녹은 형상인 롭 윈느의 거울 작품들은 마음속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책과 예술품이 가득한 작업실에서 삶을 시처럼 음미하는 그를 만났다.
내가 롭 윈느(Rob Wynne)를 만나게 된 것은 친구 로야(Roya)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롭 윈느의 작품 활동을 돕는 후원가이자 컬렉터다. 뉴욕에서 아트 컨설팅을 하고 있는 내게 롭 윈느 소장품을 보여주는 등 적극적으로 그를 만나볼 것을 권했다. 그녀의 집 한쪽 벽면에 걸린 롭의 작품은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고, 작품을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게 되었다. 로야는 항상 나에게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그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반갑게 인사하며 가벼운 포옹을 건네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내게 먼저 친근한 미소와 인사로 반겨주었고, 그 따뜻한 첫인상은 아직 내 마음속에 깊게 새겨져 있다. 그와 나는 금세 좋은 친구가 되었고, 내가 그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우리는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예술을 향한 강인한 인내심과 열정, 긍정적인 태도, 남다른 재능까지 겸비한 예술가가 바로 롭 윈느다.
회화와의 결별, 새로운 탐구의 시작
롭 윈느의 작품은 거울과 유리를 소재로 하는 설치 작품으로, 크고 작은 알파벳 철자들이 모여 짧은 문장을 만든다. 겉으로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각각 다른 것을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의 작품 역시 보는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에 따라 특별할 수도 있고 평범하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그는 문학이나 시에 표현된 인상 깊은 문구를 작품에 인용한다. 글 속에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에 작품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바가 다르고 그 맛이 새롭다. 오래전부터 글이 가진 깊이 있는 힘에 매료되었던 그는 글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자신만의 감성을 실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제 전공은 그림이었어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끝나지 않는 숙제와도 같았죠. 어디에서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 항상 고민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작업은 그렇지 않아요. 늘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죠. 비로소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는 20년 가까이 추상화에 매진했지만 늘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980년대 무렵, 애증의 관계처럼 줄다리기하던 회화를 접고 다른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잠시 시간을 두고 새로운 소재를 찾던 중 자연스럽게 ‘언어’와 관련된 작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뉴욕 예술계의 전설적인 컬렉터이자 아트 딜러인 홀리 솔로몬(Holly Solomon)이 제 새로운 작품에 관심을 보이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그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녀가 타계한 뒤 딜러와 작가 간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유감이죠.” 유리를 소재로 한 그의 첫 번째 작품은 1996년 홀리 솔로몬의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됐으며, 그의 작업 세계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처음으로 제 작품에 대해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고, 비로소 작품 만드는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에 대해 스스로에게 확실하게 ‘NO’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된 거죠.” 보다 본능적이고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면의 집착으로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 단 하나의 작품
그는 보통 뉴저지 휘튼(Wheaton)에 있는 공방에서 작품을 만들지만, 가끔 브루클린에 위치한 ‘어번글래스’라는 곳에서 작업하기도 한다. 보통 4명의 조수가 붙어 3개월 이상 작업에 몰두하는데, 작품을 스케치하고 정교한 기술로 모양을 만들어 굽는 과정을 거친다. 그는 절대 와플 찍어내듯 몰딩으로 똑같은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한 작품만을 위해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작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20년 가까이 저와 함께 일했어요. 제가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죠. 때문에 늘 결과물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는 동일한 작품을 찍어내는 에디션은 만들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뉴욕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롭 윈느는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뉴요커로, 트라이베카(Tribeca)와 소호(Soho)에서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소호에서만 36년을 살았어요. 한때 이곳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계속 거주하기 쉽지 않았던 때도 있었죠.” 집과 작업실을 같은 장소로 사용하는 그가 평소에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9시에 일을 시작해 6시에 마무리합니다. 가끔 늦은 밤, 시간을 정해놓고 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마음껏 그림을 그릴 때도 있습니다. 작업실과 집을 함께 쓰는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것이겠죠.” 롭은 뉴욕에서 예술가로 살면 장점이 많다고 말한다. 수많은 갤러리와 박물관을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가 친구와 딜러들을 만나 자신의 작품을 세
상에 알릴 기회 또한 많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가로서 뉴욕 말고 다른 곳에서 산다는 생각은 할 수 없어요.”
낮과 밤을 투영하는 새로운 시도
그는 오는 10월, LA에 있는 가블라크(Gavlak) 갤러리에서 검정색 유리를 소재로 하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은 모두 은색의 유리 소재였어요. 검정색을 소재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는데 만들어보니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어요. ‘낮과 밤’ 같은 의미를 띠고 있거든요. 2015년, 파리에서 선보일 계획이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새로운 방향에 맞춰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번 세계적인 기업과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고, 결과물에 대해 만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의 박물관, 갤러리와 함께 전시하고 싶습니다. 설치 작품이 아닌 주얼리 분야도 더 깊이 탐구하고 싶고요.” 불완전한 유리 소재를 포용해 완벽한 텍스트 조각 작품으로 승화시킨 롭 윈느. 다양한 소재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 활동이 앞으로 더욱 기대된다.
글·강희경 | 진행·이소진 | 디자인·김진영 | 사진·강재석 | 번역편집·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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