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랄프 스테드먼 스토리>
카메라가 켜지고 백발성성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그는 노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랄프, 지금 우리가 무얼 하고 있죠?”
이들은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랄프 스테드먼’이라는 삽화가의 삶과 예술적 신념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제목은 <랄프 스테드먼 스토리>, 부제는 ‘이상한 나라의 친구들’입니다.
연출은 세계적인 CF, 뮤직비디오 감독인 찰리 폴이 맡았습니다. 평소 랄프에게 큰 영감을 얻었다는 그는, 그래서인지 시종일관 랄프의 작품을 닮은 감각적인 영상으로 관객들에게 시각적 유희를 줍니다. 랄프의 초기 작품부터 스케치, 사진, 비디오와 녹음 파일까지 노 화가의 삶이 녹아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해 재치있는 다큐멘터리를 선보이죠. 몽타주 형식의 인터뷰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엮은 화려한 편집 기술은 단연이 영화의 강점입니다. 랄프 스테드먼의 예술 세계가 뛰어난 영상 이미지로 섬세하게 구현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또 있습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노 화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는 것이죠. 영화배우 조니 뎁. 맞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 그는 랄프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일종의 가이드입니다. 조니 뎁이 묻고, 랄프가 답하는 형식으로 영화는 전개됩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독특한 구성의 다큐멘터리는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었던 랄프 스테드먼의 작업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작업실은 이상한 나라로 향하는 토끼굴 같습니다. 토끼굴로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랄프의 삶은 물론 그와 함께했던 ‘이상한 나라의 친구들’의 삶을 통해 붓 하나로 그가 어떻게 세상과 맞서왔는지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무기
‘토끼굴’에 하얀 도화지가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랄프는 주저 없이 백지에 검은 물감을 뿌립니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뚜렷한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이 가는 대로 물감을 뿌리니 괴기스러운 말(馬) 형상이 나타납니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가 주로 쓰는 방법이죠. 어떤 그림이 나올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면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이 사라질 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랄프는 말합니다.
랄프 스테드먼의 작업 방식은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 같습니다. “물감을 듬뿍 찍어 바르고, 빨대로 훅 불어내기도 하고, 마른 물감을 긁어 벗겨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혼미하고 어지러운 현대인의 자화상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랄프의 작품은 기괴한 면이 많습니다. 따뜻하지 않고, 매끄럽지 않으며, 아름답지도 않죠. 그러나 분명, 강력한 힘은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말입니다.
1970년, 천 장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미국으로 떠난 랄프 스테드먼은 ‘빈곤과 궁핍의 박물관’ 같던 뉴욕 빈민가의 순간들을 작품 속에 얼려놓습니다. 이후 그의 시선은 줄곧 어둡고 후미진 곳에 머물게 됩니다. 그의 작품 단골 소재는 퇴색한 종교, 끔찍한 전쟁, 곪아버린 인권입니다. 베트남전 때는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림을 그렸고, 걸프전 당시에는 사람 시체가 패티로 들어간 햄버거를 누군가가 먹으려고 하는 ‘워 버거(War Burger)’를 그립니다. 충격적인 현실을 그린 그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메시지 분명한, 에너지 넘치는 그의 그림에 열광했습니다. 이후 랄프는 《뉴욕타임스》 《가디언》 《롤링스톤》 등 여러 매체의 지면을 장식하게 됩니다. 랄프 스테드먼은 말합니다. “내가 그림을 배운 것은 잘 그린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무기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삽화는 그에게 권력과 폭압에 저항하고 비난할 수 있는 무기가 됩니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을 악랄하다 말했지만 그는 통찰력 있는 할리우드 최고의 삽화가로 손꼽히게 됩니다. 영화 속 지난날을 회상하던 랄프는 “평화, 정의 구현에 몫을 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40여 년 옳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그림을 그려온 랄프 스테드먼, 그의 마지막 나날은 잔인하게 그릴 것이 없어 아름다운 것만 그리는 모습이라면 어떨까요. 그것이 랄프가 긴 시간 그림을 그려온 이유일 것입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어떤 영감은 세상을 바꾼다. 당신의 삶에도 영감이 깃들길!” 세상을 바꾼 그림을 그린 랄프 스테드먼에게도 영감을 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피카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천재성은 노력할 줄 아는 능력이다”라고 말하는 랄프는 실제로 천재적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되어 그의 작품과 활동을 직접 체험합니다. 이러한 경험들로 랄프 스테드먼은 자유롭고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게 되지요.
랄프 스테드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또 있습니다. 헌터 S. 톰슨. 그는 죽고 없지만 <랄프 스테드먼 스토리>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랄프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헌터 S.톰슨과의 작업을 통해서입니다. 1970년대 미국 3대 경마대회인 《켄터키 더비》 취재를 준비 중이던 헌터는 랄프에게 삽화가로 합류하길 권합니다. 두 사람이 만든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는 20세기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게 되지요. 그리고 이들로부터 ‘곤조 저널리즘’이 시작됩니다. 조니 뎁과의 인연도 이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998년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가 영화로 제작됐는데 그 주인공이 조니 뎁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헌터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합니다.
<랄프 스테드먼 스토리>의 원제는 ‘for no good reason’입니다. 헌터가 생전 자주 했던 말입니다. 랄프가 “우리 이거 왜 해?”라고 물으면 헌터는 항상 “특별한 이유 없어”라고 답했지요. 이유와 목적을 쫓아 살아가는 각박한 현대 사회에 쉼이 되는 말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우리는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고, 결과는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영화는 조니 뎁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글·박혜림 | 디자인·김기한 | 도움·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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