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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 컬쳐

조선시대 400년간 부를 이어 온 경주 최 부자 가문의 비법은 무엇?

by 하나은행 2015. 2. 2.
Hana 컬쳐

조선시대 400년간 부를 이어 온 경주 최 부자 가문의 비법은 무엇?

by 하나은행 2015. 2. 2.

# 부자 되는 법, 그것이 궁금하다

 

돈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물물교환에 필요한 화폐단위로 탄생했지만 이제는 집도, 차도 살 수 있는 것이 되었으니 말이죠. 이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해 이 돈을 모으고 또 더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 돈을 모으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은행에 저축해 차곡차곡 안전하게 모으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위험하지만 수익성은 보장되는 여러 방법들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알고 보면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돈을 모으고자 하는 목표는 같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만났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과 맞닿은 사람을 통해 비법과 노하우를 듣고 싶어합니다. 서점에 진열된 <1억만들기>, <성공하는 재테크비법>등 책들이 수많은 비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늘 온고지신의 가르침처럼 오래된 곳에서 찾을 수 있는 법, 오늘은 조상대대로 400년간 부를 이어온 최 부자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부자 되는 비법을 알아보겠습니다.

 

# 조선시대 만석꾼으로 부를 축적하다

 

조선시대부터 400년 이상 만석부자로 살면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 받아온 진정한 부자, 경주 교동 최 부자 가문.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경주 최부자집 또는 최진사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씨 가문이 부를 쌓기 시작한 건 빠르게 이앙법을 도입해 소출량이 늘어나면서부터입니다. 정보가 잘 유통되지 않던 시대에 경주일대에 논 매물이 나오면 소작농들이 찾아와 최 부자댁에 알렸다고 하는데요. 최 부자는 땅을 살 때 소작농들에게 소출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논을 사들여 최 부자는 만석꾼으로 부를 쌓기 시작합니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가옥은 건물재목들도 일반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질 좋은 재목들입니다. 부지가 약 2천여 평, 후원은 약 1만 평으로 집은 99칸의 대저택입니다. 집안에 살았던 하인만 약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집안 규모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쌀을 보관하는 뒤주는 한번에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최 부자 가문이 지금까지 존경받는데는 그들만의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가훈 때문입니다. 400년동안 부를 지켜올 수 있었던 최 부자 가문의 6가지 교훈은 무엇일까요?

 

# 400년간 부를 쌓을 수 있었던 최 부자 가문의 6가지 가훈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과거를 급제한 양반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말이 조금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사내대장부라면 세상을 호령할 만큼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니 말이죠. 

사실 이 첫 번째 가훈에는 권력을 탐하지 말라는 최 부자 가문의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진사로 양반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에서는 멀어지라는 의미죠.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 합격자를 가리킵니다. 벼슬이라기보다는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벼슬을 하면 욕심이 끝이 없고, 권력을 가까이 하면 다툼과 정쟁에 휘말려 가문이 몰살되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최 부자 가문은 권력이 아닌 부에 집중했고, 이 부를 통해 양반의 도를 실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부자라 함은 자고로 부가 넘치고 넘치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지만 최 부자는 후손들에게 만석이라는 상한선을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만석을 넘을 경우 그 이상은 소작료를 낮춰 받았습니다. 다른 부잣집들이 수확량의 70%정도를 받았다면 최 부자는 40%에서 멈춰 수확의 혜택이 소작농들에게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혜택에 경주일대의 소작인들이 너나할것없이 최 부자댁의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최씨 가문이 논을 사면 도리어 농민들이 박수를 치며 반겼다고 하니, 얼마나 명성이 자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소작인들은 높은 수입이 돌아오니 더욱 열심히 일했고, 결과적으로는 최 부자 가문의 재산은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흉년 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굶어죽는 사람들이 수천, 수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내놓는 것이 바로 땅이었습니다. 이들이 헐값에 땅을 내놓으니 부자들이 부를 늘리기에는 이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흉년에 싸게 사들인 땅은 곧, 소작농들에게 높은 소작료를 받을 수 있는 밑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 부자 가문은 백성들의 이런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흉년 기에는 땅을 사들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위해 내놓은 땅을 헐값에 사들이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최 부자 가문의 지혜로운 소비가 또 하나 있었는데요. 물건값이 떨어지는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다른 이들이 파장까지 기다려 물건값이 떨어질 때 사들였지만 최 부자 가문은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해 상인들에게 금액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나중에는 상인들이 제일 질 좋은 물건을 들고 최 부자 댁에 찾아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최 부자 가문의 가르침은 인심과 덕을 쌓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최 부자 가문에서는 1년에 약 1000석의 쌀을 과객들의 식사에 대접했습니다. 과객들이 묵는 사랑채에는 별도의 뒤주를 둬 그들이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선행처럼 보이지만 이 인심은 후에 민란 속에서 가문을 지키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사랑채에서 후하게 대접받았던 과객들은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최 부자 가문의 인심을 소문 냈고, 최 부자 가문의 인심은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졌습니다. 당시 경상도 일대에는 부잣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했는데, 최 부자 집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집안의 인심과 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 부자 가문은 가진 자 일수록 나눠야 한다는 덕목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최 부자 가문의 1년 쌀 생산량이 약 3천석 정도 였는데 1천석은 사용하고, 1천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눠주었습니다. 

사실 이런 나눔의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해년(1671)년 당시 큰 흉년이 찾아왔을 때 그는 “주변 사람이 다 굶어 죽는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 라고 말하며 곳간을 열었다고 합니다.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부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최 부자 가문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창고가 바닥을 보일 정도로 베풀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부만 생각하지 않고 다 함께 잘사는 법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6.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간 무명옷을 입어라

마지막 교훈에는 최 부자 가문의 엄격한 근검절약정신이 담겨있습니다. 당시 조선시대는 집안 창고 열쇠를 여자가 가지고 있던 시대입니다. 때문에 집안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습니다. 

 

최 부자 가문에서는 여자들에게 근검절약생활을 가르치기 위해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시집온 후 3년간은 무명옷만 입도록 해 새로 시집온 며느리들의 몸에 절약정신이 베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교육받은 후손들은 몸에 베인 절약과 근검한 생활로 400년 부를 지켜왔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로웠던 최 부자 가문의 철학을 지켜온 진정한 가훈이었습니다. 

최씨 가문의 부는 최준의 대에서 끝이 납니다. 최 부자 가문의 부의 끝은 몰락이 아니라 시대를 공헌이었습니다.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은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로 마지막까지 거액의 자금을 제공합니다. 또 그는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했는데요. 지금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설립해 사회공헌에 앞장섰습니다. .

 

#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중하다


최 부자 가문의 6가지 가훈에는 바로 이 사람중심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사람이 귀함을 알고 쌓인 부로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 최 부자 가문이 400년동안 부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도 부자를 꿈꾸고 있다면 최 부자 가문의 6가지 교훈을 꼭 잊지 마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