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퍽한 일상에 봄볕 같은 소소한 위로, 에바 알머슨
그런 날이 있다. 우산도 없는데, 키 작은 하늘에선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세상이 내 편이아닌 것처럼 하는 일마다 틀어지는 날.
만나는 사람들마다 뻐걱거리며 가슴 가득 상처만 안고 돌아서는 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축 처지고, 머피의 법칙이 착착 들어맞는 그런 날. 힘겨웠던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누군가의 위로가 막연하게 그리운 날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하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 누군가가 필요한 그런 순간.
‘그런 날’이면 문득 에바 알머슨(Eva Armisen)의 그림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림을 보다 보면 힘겨웠던 일상은 스르르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따뜻하고 행복해진다. 예쁘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은 인물의 미소는 어느 순간 전염되어 내 입가에 번진다. 그녀의 그림은 마치 행복이라는 것이 뭐 별거 있겠냐는 것만 같다. 누구나, 언제나 느끼는 ‘순간’이지만 그냥 스쳐가는 소소한 일상들을 그렇게 소소하게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웃으며 행복할 수 있다고, 곁에 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고 알머슨의 그림은 말한다.
소소한 일상에 대한 찬사
알머슨의 그림에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소소한 일상들로 가득 차 있다. 낯선 손님이 찾아오자, 수줍은 듯 꽃무늬 커튼 속으로 숨어 수줍게 인사하는 아이<Hello>의 모습이라던가, 지친 하루를 지내고 가족들과 함께 지난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디저트를 먹었던 시간<Dessert>,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며 춤을 추며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그 순간<Dancing>. 그뿐이 아니다.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걸을 때면 그 길이 어쩌면 그렇게 길게만 느껴졌는지<Walking>. 그러고 보면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던 날들도 많았다
<Waiting for you>. 쳇바퀴 돌 듯 돌아가던 일과를 마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빈둥빈둥 보낸 한가했던 휴일 오후<Relax>를 그리워할 때도 있었다. 갖고 싶었던 원피스를 사 입고는 왕나비가 된 것처럼 기분 좋았던 날도 있었고<Sometimes I fell like a monarch butterfly>,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당황하고 부끄러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땅에 파묻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Sometimes I feel shy>. 돌이켜보면 너무나 특별할 것 없기에 소중하다고 생각해본적 없는 그런 순간들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행복했었는지 알머슨의 그림은 이야기한다.
물론 박사 학위에 유학까지 다녀와도 일자리 하나 찾기 어려운 퍽퍽한 세상에서, 상대방을 밟고 서지 않으면 내가 뒤처진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알머슨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찬사를 누군가는 불편하게 혹은 속편한 이야기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한 개인이 궁극에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알머슨의 그림은 이렇게 질문하며 ‘당신, 지금 잘 살고 있어요?’라고 묻는 것만 같다.
못생겨도 괜찮아
오늘 하루 잘 지냈냐며 살며시 곁에 다가와 묻는 그녀의 그림들 속 인물들은 사랑스럽다. 인형처럼 예쁘고 잘생겨서가 아니다. 딱히 누군가를 닮은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둥글둥글 평범한 (어쩌면 조금은 못난) 얼굴을 하고 미소 짓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감동을 종용하는 어떤 극적인 설정이나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림 속 인물들이 이토록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알머슨이 인물의 감정 자체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알머슨 작품의 독특함이 드러난다. 대체로 그의 그림에는 하나 혹은 두 명의 인물만 전면에 드러난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정보는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정보만 전할 뿐이다. 예를 들어 <Travelling>의 경우 두 남녀가 든 비슷한 모양의 검은 가방이 이들이 곧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고, <One, Two, Three lets go>의 인물 뒤에 있는 레일이 아마도 이들이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고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알머슨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날의 특별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심리 상태들은 알머슨 특유의 컬러감과 화면 전체를 아우르는 자연스러운 곡선의 부드러움을 통해서 드러난다.
스페인에서 온 유쾌한 화가
알머슨은 옛 아르곤 왕국의 수도였고, 화가 고야의 고향이기도 한 사라고사 출신이다. 가본 적 없지만 스페인 북동부 이 도시에 특유의 하늘 빛깔과 공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라곤 시대부터 이어온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전통과 흔히 말하는 유쾌한 스페인의 기질이 알머슨에게도 자연스레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닐까. 그 영향이 알머슨만의 타고난 색감과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풀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선에는 고민의 흔적이 없다. 마치 단번에 그려나가듯 검정색으로 시원스레 인물의 아웃라인을 그려간다. 때문에 의외로 그림 전체에 검정색이 많이 쓰이고 있지만 그녀의 그림이 어둡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오히려 검정색 선 안에 들어가 있는 화려한 무늬와 색깔들과 어울려 전체적으로 어두워지기는커녕 더욱 경쾌해 보인다.
예를 들어 <Wait for me>나 <Walking> 같은 작품들은 인물, 특히 원피스 무늬를 통해서, 배경 이미지나 컬러에 의해서 인물의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알머슨 방식을 아주 잘 보여준다. 또 다른 예로 <Walking under the moon>처럼 검은색이나 회색조가 주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발그레한 핑크빛 볼과 꽃무늬 원피스의 분홍색 악센트는 둥근 보름달과 어울려 그 산책의 순간이 꽤나 행복한가 보구나, 하고 짐작하게 된다. 심지어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울어본 적 없을 것 같은 그 미소에 약간 시샘이 나기도 한다.
위로를 건네는 그림
행복이 저 먼 무지개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퍽퍽한 삶은 스쳐가는 행복의 순간들을 무심결에 놓쳐버리게 한다.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 같은 날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날들. 알머슨의 그림들은 그런 회색의 날들에 무지개를 드리워준다. 저 멀리 보이는 무지개를 찾아 떠나야 하는 긴 여행이 아니라, 그녀의 그림이 무지개가 되어 보는 이의 일상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물론 전쟁과 기아, 테러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그 안에 있는 작은 행복들에 감사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상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또 알머슨의 그림을 통해 화사한 봄볕 같은 위로를 받은 마음은 《플랜더스의 개》에 나오는 네오와 파트라슈가 마침내 루벤스의 <성모 승천> 아래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는 순간 받았던 위로와는 다른 것이다. 때문에 누군가는 알머슨의 그림에 대해 날선 비판의 칼날을 세울지도 모르겠다. 그저 잠시 고달픈 일상을 잊게 하는 달콤한 사탕 같은 것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그냥 그런 일러스트 같은 그림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특히 현대 예술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언급해야 하며, 나아가 세상의 부조리와 그릇됨을 고발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은 더 이상 보기만 하는 시각예술이 아니라, 읽고 공부해야 하고, 자각해야 하는 것이라 치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상에 만족하고 안주하기에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일리 있는 이야기이지만, 모든 예술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예술은 세상을 바꾸는 일의 선봉에 서서 목 놓아 외칠 필요도 있고, 어떤 예술은 상식을 뒤집는 기발함으로 관객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 때론 두 가지 특성을 모두 살린 강력한 예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선물하고 싶은 그림, 바라보며 위로받을 수 있는 그런 그림도 필요하다. 그것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좀 더 따뜻하게 빛날 수 있다면, 한 점의 그림으로 입가에 미소 짓는 순간이 조금 더 많아진다면 예술을 통해 우리 삶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머슨이 다양한 협업 작업으로 관객에게 다가가려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있는 것 같다. 작품을 좋아한다고 누구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녀에게 컬래버레이션이나 아트 상품은 그저 상업적인 이익을 내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작품을 살 수 없지만, 그림 속 인물의 미소를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화장품 케이스에, 머그잔에, 혹은 동화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자신의 행복했던 순간을 담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인 듯 하다.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아트 상품으로 협업의 결과물로 성공적일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알머슨의 작업에는 잘 어울린다.
어쩌면 알머슨의 그림은 미술 시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며 기사화될 수 있는 그런 작업은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비엔날레나 블록버스터 전시에서 즐겨 찾는 작품은 아닐 수도 있다. 세계적인 비평가들이 이리저리 분석하고, 새롭게 해석해 미술관에 고이 모셔놓을 그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머슨의 그림은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그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회색 도시 안에서 퍼석해진 감정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우리들에게 화사한 봄볕 같은 그런 그림이다. 길었던 겨울도 끝나간다. 곧 나무들은 수줍은 연둣빛 잎사귀를 펴 보일 테고, 꽃향기 가득한 공기가 퍼질 것이다. 그 봄볕 한쪽에 알머슨의 그림을 두고 싶은 마음은 아마 위로받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쓴 신보슬은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다.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 전시팀장, 대안공간 루프 책임 큐레이터를 거쳐 2007년부터 토탈미술관 책임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인도, 말레이시아 등지를 작가와 함께 여행하며 <로드쇼> <Playground in Island>와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주요 전시로는 독일 뷔어템베르기셔 쿤스트페어라인과 공동기획한 <Acts of Voicing>, 세계적인 현대미술작가 문타다스의 개인전 <Muntadas: Asian Protocols> 등이 있다.
EVA ARMISEN 전
기간 5월 20일 ~ 6월 2일 장소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3층
글·신보슬 | 진행·이소진 | 디자인·우선영 | 도움·장흥아트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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