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생물학과 강영희 명예교수, “작은 관심이 세계 석학을 만듭니다”
전기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분야에서 세계 정상이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량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한 학자의 위대한 업적은 오직 한 사람만의 유산이 아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변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0여 년간 대한민국 생물학계의 거장으로, 우리나라의 생명과학 발전을 위해 노력한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강영희 명예교수가 그런 인물이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한 빌라.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지만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노부부가 문 앞에 나와 기자를 맞이한다. 약속시간이 되기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노부부는 훨씬 이전부터 모든 준비를 정갈하게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깔끔한 정장차림의 노교수의 첫 인상은 따뜻하고 품위가 넘쳤다. 강영희 교수는 한 편에는 인자함을 지닌 아버지,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학자의 모습도 엿보였다.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강영희 명예교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생물학계의 거장이다. 그는 1950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생물학을 전공했다. 1962년 조교수로 부임 후 1965년 일본정부초청으로 일본 동북대학교 대학원 농학연구과에서 농학박사를 취득했다. 1995년 정년에 이르기까지 교학부총장, 사회교육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한국식물학회, 한국토양비료학회, 한국식물조직배양학회, 고려인삼학회, 한국생물과학협회 등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학자로 참여해 국내 생물학계의 든든한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자택 이곳저곳을 안내하던 강 교수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서재로 이끌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그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바로 서재이다. 서재의 책꽂이에는 강 교수가 편찬한 중·고등 교과서를 비롯해 그의 저서 60여 권이 꽂혀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이 가는 두툼한 책이 있었다. 총 11권에 달하는 생명과학대사전이다.
우리나라 생물과학의 토대를 만드는데 힘써
많은 학자들이 연구업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하지만 강 교수는 여태껏 그런 욕심을 낸 적이 없다. 그저 학문의 발전과 많은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연구를 목표로 삼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과학대사전은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일본 동북대 농과대학에서 만난 은사께서 한국에는 생명과학 관련 사전이 없는데 한 번 편찬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어요. 저 역시 오랜 시간 이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한 단어, 한 이론을 보기 위해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늘 아쉬웠습니다. ‘한 눈에 관련된 이론을 모두 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했던 터였죠.”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세계에서 손꼽히는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근면성, 우수성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 10위권에 빠른 시간 진입이 가능했다. 1990년 말부터는 IT가 우리나라 성장에 큰 기반이 되어주었다. 강 교수는 “향후 BT가 그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하며 초석을 다지고자 생명과학대사전의 편찬을 계획했다. 재직 중, 60여 권의 저서, 100여 편 이상 전공논문, 43편의 정책과제 등을 남긴 강 교수였지만 생물과학대사전의 집필은 쉽지 않았다. 생물과학대사전을 쓰기까지 자료 준비만 10년, 집필에만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2008년 2월 25,000여 어휘가 수록된 생명과학대사전이 탄생했다. 자신이 그렇게 갈망하던 사전이 완성됐지만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더 나은 모습의 생명과학대사전으로 탈바꿈을 모색했다. 2014년, 초판의 25,000 어휘에 37,000 어휘를 추가, 총 62,000여 어휘를 수록해 개정판을 출판했다. 그는 “사전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계속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설명했다. “과학 분야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합니다. 그 속도는 예측이 안 될 정도예요. 그만큼 내용과 용어가 계속해서 새롭게 나오니, 양이 방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개정판까지 출판하게 됐습니다. 초판은 한 권의 책에 불과했지만 개정판은 더 많은 내용을 수록해 11권의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루고야 마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한 번 잡으면 끝을 봐야하는 성격 탓에 그는 하루에 5시간밖에 자지 않으며 편찬에 매달렸다. 밤 10~11시에 잠자리에 들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과정을 반복했다. 모든 연구의 기본은 자기관리에서 시작된다고 여겼기에 새벽 5시면 헬스장에서 몸을 단련하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노력 덕분. 그의 아내는 평생 수험생과 함께 사는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가끔 후배들이 물어보곤 해요. 어떻게 장시간 한 분야에만 매진할 수 있었냐고요.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시간을 많이 가져라’ 하루에 6시간 자는 사람과 5시간 자는 사람에겐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한 시간이라도 더 투자한다면 변화는 분명히 이뤄집니다. 작은 것 같아 보여도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죠.”
그는 긴 세월동안 자기관리에 투자하는 습관, 노력·정신력 등으로 버텨왔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조금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다고. 평생동안 변변한 여행 한 번 다녀오지 않고 오로지 서재에만 틀어박혀 연구와 집필에만 매달려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어떤 일이든지 사명감이 없다면 힘든 것 같아요. 저는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공부를 하라고 주문합니다. 단순히 암기하는 공부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공부를 하라는 거죠. 그런 면에서 생명공학기술(Bio Technology) 분야는 좋은 학문인 것 같아요. 개척하는 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역시 아무리 굴을 파도 햇빛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곧 ‘길이 열릴 것이다’는 믿음으로 계속해서 걷다보니 마침내 빛이 보였다. 그는 이제 제자들에게서 새 희망을 본다. 그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을 배출하고 최고의 석학을 키워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연세를 빛낸 동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자와 후배들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명예교수
“학생들을 만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았다”는 강 교수는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줄 아는 학자다. 후배들을 위해 사용해달라며 모교에 소장도서 4,000여 권과 임야 5,000여 평을 기증하기도 했다.
“책이 귀하던 시기에 일본의 은사가 제게 읽어보라고 책을 전달해줬던 게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 책을 번역하며 다양한 자료들을 섭렵할 수 있었죠. 그것이 이렇게 큰 사전을 만드는데 토대가 된 것 같아요.”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연과학 및 식물학 분야에 큰 획을 그을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한 사람의 학자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며 지지를 당부했다. 학자가 가진 사명은 위대했다. 그의 꿈이 이뤄질 날을 고대해본다.
글 여경미 기자 사진 임익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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