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공간, 사색의 시간
이은채의 공간은 늘 따뜻하다. 촛불이나 램프가 은은하게 방 안을 밝히고 있거나온화한 햇볕이 창 안으로 쏟아진다. 눈에 익은 그림 한 점이 벽에 걸린이 아늑한 공간에서 우리는 몽상가가 된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날 즈음이면막 꺼진 촛불의 연기가 추억의 형상을 하고는 감실감실 피어오른다.
2010년 첫 개인전 이후 거의 매년 개인전을 하셨죠? 올해도 어김없이6월 개인전을 앞두고 있고요. 아주 부지런한 작가로 알려져 있어요.
꾸준히 작업을 해왔어요. 전업 작가니까 ‘열심히 산다’고 하면 그게 그림을 그리는 일인 것 같아요. 올해 6월 아트팩토리 서울에서 있을 개인전 준비도 하고 페어에도 꾸준히 참여했고요. 페어에 자주 나간다고 하면 간혹 어떤 분들은 작품이 잘 팔리는가보다 하고 오해도 하시는데 사실 그렇진 않아요. 늘 신작을 그리고자 하는 제 입장에서는 페어도 전시라고 생각하거든요. 작가로 산다는 게 늘 감사하고 행복해요. 작업외 시간에는 음악도 듣고 명상도 해요. 명상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영향을 받았고요.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작가의 기를 쏟는 일이기 때문에다른 데서 에너지를 얻으려고 하는데 그게 제게는 명상인 것 같아요.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기도 하고요. 명상을 하면서는 여러 장르의음악을 들어요.
‘촛불’ 얘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아요. 촛불은 이은채라는 작가와 등가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이제껏 작품들에서 종과 횡을 가르는 상징적존재잖아요.
제 그림의 시발점이자 주축이죠. 그 이유는 제가 자라온 환경과도 연결되는데, 아버지가 주역을 공부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제게 “너는 한낮의 촛불로 태어났다, 그 빛으로 사람에게 베풀면서 자라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촛불에 대한 형상성에 대해서도 자주 말씀을 하셨고요.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은사님에게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소개받았어요. 은사님은 명상에 대한 작품을 많이 하셨고 초를그리시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감히 초를 그리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죠. 그러다 대학원에 들어와서야 은사님께 말씀드렸죠. “초를 그리고싶습니다”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꽃초’를 그렸어요. 바슐라르가 얘기했던, 식물적인 초 의미에서 착안한 작품이었죠. 촛불은 제 자신처럼여겨지는 상징적 존재예요.
촛불은 첫 개인전 때부터 현재까지 추억과 몽상의 메타포로 작품에서그려져왔죠?
램프나 반딧불이, 태양까지 여러가지 불의 기호들을 작품에 그렸지만 그중 추억을 되살
리고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근본적인 이미지의원형 기호는 촛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가장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기호라고 여기고요. 촛불을 켜는 순간, 현실과 다른빛의 공간이 생기죠. 이 빛의 공간 속에서, 영적이고 내면적인 소리에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치 예전의 음악, 오래된 미술 작품과고전을 접하면서 시공간을 초월해 그 시대의 작가와 만나는 순간과도같은 것이지요. 온기를 지닌 촛불이 놓인 공간은 과거와 현재를 공존하는 공간이자 상상적인 공간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영원의 공간이에요. 추억과 몽상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실 촛불의 의미는 아주 포괄적인 셈이죠. 또 제게 있어 추억이란 막연히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과거의 여러 기억들과 꿈이 혼재된 것이기도 하고요.
최근 작품으로 오면서 빛의 의미가 좀 더 확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적으로 지난해 개인전 <영원 속에 빛>은 이전의 전시 제목들에공통적으로 들어갔던 ‘촛불’ 대신 ‘빛’이라는 단어가 쓰였고요. 추억과몽상의 의미가 보다 초월적이고 영원으로 확장된 느낌이랄까요.
처음부터 추억과 몽상의 한정된 메타포로 촛불을 고집한 건 아니었어요. 촛불 자체로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의도적으로빛의 의미를 확장시킨 건 아닌데 소재 면에서 초에 집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사실 제가 알려진 계기는 촛불이 아닌 전기 램프가들어간 작품이었고요. 그러다 보니 점차 ‘빛’ 그 자체를 살려야겠다는생각을 했어요. 태양도 램프도 모두 빛이잖아요. 명상적이고 사색적인느낌은 그대로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래도 촛불을 그리는 작업은지속적으로 할 것 같아요.
램프나 초가 놓인 공간이 밤보다는 낮일 때가 더 많아요. 인공광과 자연광에 각기 다른 의미를 둔 것인가요?
시간성을 살리고 싶었어요. 지난 개인전 <한낮의 촛불>이나 <촛불 켜는 아침>에서 선보였던 <사라지는 추억> 혹은 <떠오르는 추억>이라고제목을 붙인 작품들이 있어요. 밤새 켜놓았던 램프가 아침이 되어 꺼지면 밤에 떠올렸던 생각들 또한 사라진다는 의미를 반영했죠. 반대로 초저녁이나 밤에는 추억들이 ‘떠오른다’는 의미로 불을 켠 초나 램프를 그렸고요. 사색이 피어났다 또 사라지는, 그런 시간성을 살리고 싶었어요. 시간성은 최근 작품에서는 잘 표현하지 않는 부분이에요. 말로 설명하는 게 회화의 전부가 아니듯, 제 스스로 자꾸 의미를 담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기법 면에서도 변화가 보이는데, 초기 작품들이 약간 비비거나 뭉갠듯한 기법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최근 작품은 훨씬 뚜렷해졌어요.
사색적, 몽환적인 작품이 많다보니 처음에는 기법조차도 뿌옇게 하거나 비벼서 그리면 어떨까 했어요. 초기 작품은 그래서 좀 뭉개져 있죠.그런데 몇몇 분들이 제 작품을 보시고 “굳이 뭉갤 필요 있을까, 꼭 그렇지 않아도 되겠다” 하시더라고요. 또렷하게그리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주변 얘기를 들으니 기법 면에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또 제작품 안에 명화를 차용하다 보니 명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쉽다는 말씀도 더러 하시더라고요. 물론 100% 똑같이 그릴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경 썼던 부분이 있었죠. 그러면서 붓끝이 좀 더 살았고요. 확실히 선명해졌죠. 사실 가까이에서 보면 또렷함과 뭉갠 듯한 기법이 섞여 있거든요. 기법적인 부분은 계속 고민할 것 같아요.
아마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작품마다 차용한 명화들일 텐데요. 초기에는 바로크 시대 ‘촛불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이 눈에 많이 띄어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이 이은채 작가 작품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꽤 영향을 미친 화가라고 이전에도 밝히신 바 있어요.
처음 작가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제가 아주 어두운 그림을 그렸어요. 당시 제가 고민이 많았던 시기여서 지금과는 분위기가 다른 작품을 그렸던 것 같아요. 그때 은사님도, 또 한 평론가도 제 그림을 보고 조르주 드 라 투르의 그림이 생각난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의 그림은 섬뜩한 분위기마저 들기도 해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삶이궁금해져서 공부해보니 곡절이 많은 인생이더라고요. 촛불과는 별개로뭔가 애착이 갔어요. 그래서 제 초기 작품들에서 조르주 드 라 투르의작품들을 차용했죠. 얀 베르메르 작품도 많이 넣었어요. 베르메르 역시명상과 사색이 반영된 작품이 많아 제가 그리고자 한 작품에 어울린다고 생각했고요.
명화 역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품 안에 배치했다고 들었어요. 명화를 고르는 기준이 있나요? 모딜리아니의 <잔 에뷔테른의 누드>가 차용된 2011년작 <촛불 켜는 아침>은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담긴 작가 본인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상징적으로 재해석된 경우라고할 수 있잖아요.
어떤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조르주 드 라 투르나 얀 베르메르처럼 명상성이나 빛이 주요한 요소로 여겨지는 작품을 넣기도 하지만 언급하신 모딜리아니의 작품처럼 작품 자체에 작가의 사연이 담겨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작품을 차용하기도 해요. 모딜리아니가 죽고 난 후 연인 잔이 임신한 채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잖아요.<촛불 켜는 아침> 속의 촛불은 잔을 추모한다는 의미가 있죠. 하지만<지난밤>에 그린 신윤복의 <미인도>는 작품 그 자체의 의미를 살리기보다는 본래 제가 의도했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써 유명한 명화이기에 넣었다고 할 수 있고요. 그 외 동양화의 경우 대개 초월적이거나 안빈낙도한 삶을 담은 분위기를 담고 싶기도 했어요. 제 입장에서명화는 아주 비중이 크지는 않아요. 음악으로 치면 주 멜로디가 아니라 베이스인 것이죠. <어젯밤>처럼 두 개, 네 개의 작품이 한꺼번에 차용된 작품도 있어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조형적인 요소죠.시를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명화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어요. 김소월의‘길’이란 시를 보면 팔대산인의 <팔팔조도>가 떠오르고 이해인의 ‘촛불켜는 아침’을 읊다가 모딜리아니의 <잔 에뷔테른의 누드>가 떠오르는식으로요.
작품은 거의 실내가 배경이에요. 또 대부분의 작품 속에 의자나 테이블이 배치되었고요. 나비나 나방 역시 자주등장하는데, 어떤 의도가있는 것인지요?
물론 실내가 아닌 밖에서도 사색할 수 있지요. 산책이나 여행하면서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램프나 초 등의 소재 때문에 실내를 주로 그렸던 것 같아요. 제 자신이 바깥보다는 방 안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요.개인적으로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아요. 그렇다고 실제로 집 안을 꾸미고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런 관심이 그림 속에 반영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큰 의도를 가지고 그린 건 아니고요. 굳이 영향을 받았다면 명상성에 관련해선 조르주 드 라 투르에게, 실내 공간에 관련해선 얀 베르메르에게 영향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빛을 다루다 보니 실내 공간을많이 다루게 되더라고요. 나비나 나방은 불꽃에 몸을 던지는 나비 형상을 통해 몽상가의 고독을 기술했던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에서 빌려왔어요. 마침 제 작업실에 나방이 많았어요. 가만히 관찰해보니 나방은 실내에 들어와 죽더라고요. 밤에 정신없이 날아다니다가 아침에는 꼼짝없이 바닥에 붙어 있거나 죽어 있어요. 나비는 그 반대죠.빛에 반응하는 조형적인 요소로 넣은 소재예요.
유독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첫 개인전 때 선보인 <늦은 저녁>이요. 명화를 차용한 첫 작품인 동시에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 <성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를 넣은 작품이죠. 제가 처음 작품을 시작했을 때 촛불에 관련된 책을 보면서 작품을 어떻게 그릴까 고민이 많았어요. 처음에 그렸던 불의 이미지나 꽃불 이미지에서 벗어나 지금의 작품과 같은, 몽상과 추억의 공간을 그린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 애정이 가요.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관심 있는 타 분야에서 얻은 영감으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늘 하고 있어요. 빛이라는 주제는 계속 고수할 예정이고요. 촛불이라는소재 역시 제 생이 이어지는 이상 계속 그릴 것 같아요. 명화 대신 다른이미지를 차용할 생각도 있고요. 인물이 들어간 제 그림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글·유승혜 | 진행·윤연숙 | 디자인·김재석 | 사진·한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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