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브레인워시와 마돈나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의 데뷔 25주년 기념 앨범이 발매되었을 때, 사람들은 “역시 마돈나!”를 외쳤습니다. 팝아트의 대가가 그린 어느 여배우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커버는 대중음악계의 상징적인 아이콘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지요.누구의 작품인지 되물을 것도 없이, 모든 것이 그럴듯했습니다.
수상한 슈퍼스타의 등장
2008년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 번도 전시회를 열거나 작품을 선보인 적없는 신인 작가의 전시장에 5만 관객이 몰렸습니다. 줄이 너무 길어 미처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창문을 넘어 입장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LA위클리>는 ‘올해 가장 중요한 전시’ 중 하나로 손꼽았고, 피카소나칸딘스키 그림을 갖고 있는 미술 수집가들의 문의가 쇄도했습니다. 2주 남짓 계획했던 전시는 두 달로 연장되었고, 뉴욕을 비롯해 런던, 파리, 베이징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을 스프레이로 둔갑시켜 세워놓는가 하면, 명사들의 초상화를 재해석한 작품들이 쏟아지는,전시회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쇼에 가까웠던 현장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전시 주제와 꽤나 잘 어울렸지요. 팝아트와 스트리트 아트의 조화를 이뤄냈다는 평을 받으며 그야말로 화려하게 데뷔한 미스터 브레인워시(Mr.Bra inwash, 이하 브레인워시) 이야기입니다.
그 유명세가 하룻밤 꿈이 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마돈나 덕분이었습니다.성공적인 전시를 마친 이듬해, 브레인워시는 마돈나의 음악 인생 전체를 담고 있는 베스트 앨범 <Celebrati on>의 커버 작업을 맡게 됩니다. 남보다 한발 앞서는 실험적인 음악과 춤으로 대중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받아온 마돈나, 그녀의 선택은 늘 그렇듯이로운 것이었지요. 브레인워시는 1990년대 패션 매거진에 실렸던 마돈나의 사진과 그녀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1980년대 ‘Who’s that girl’ 당시의 사진을 조합해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냅니다. 덕분에 레드핫칠리페퍼스를 비롯해 유명한 뮤지션들의 러브콜을 받았지요. 이렇듯 안정적인 성공가도를 달리던 어느 날, 그의예술가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옵니다.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뱅크시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한 편이 그 논란의 중심이었지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소수의 전유물이 된 미술관을 풍자하는내용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브레인워시’라는 예술계의 슈퍼스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뱅크시의 폭로는 현대미술 전체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했지요. 브레인워시, 아니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구제 옷 가게를 운영했던 평범한 남자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첫 경험에 대해 고백합니다. “저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에요. 한 번도 전시회를 한 적도, 어디서든 작품을 선보인 적도 없어요. 그런데도 이런 큰 전시를 하는 건 일종의 사기인 셈이죠.”
미스터 브레인워시가 된 사연
브레인워시의 본명은 티에리 구에타. 그는 거리 예술가들을 따라다니며 작은 비디오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촬영하곤 했습니다. 티에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피사체이자 조력자가 되어준 이는 거리 예술의 독보적인 존재인 뱅크시. 두 사람은 거리 예술 작품이 경매에 부쳐져 엄청난 돈에 팔리는 것을 보고, 그동안 모은 기록을 세상에 보여주기로 합니다. 그러나 영상 편집에는 영 소질이 없던 티에리에게 뱅크시는 농담인 듯 진담처럼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영화는 자신이 대신 만들 테니 그동안 작품 활동을 해보라는것. 그의 말에 평범한 티에리는 운명적인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비디오를찍으며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지켜봤던 티에리는 ‘모든 예술은 결국 메시지를 반복하는 세뇌’라고 생각해, 미스터 브레인워시라는 이름을 짓고 다양한시도를 감행합니다. 그는 소품 제작가, 조각가, 디자이너를 일용직으로 고용해 자신의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실체로 만들어냈습니다. 이미 익숙한 모티프를 ‘차용’하고 복제하는 방식이었는데, 그 위에 컬러 스프레이를 대충 휘갈겨 완성시키는 식이었지요. 어디서 본 듯한 모방의 산물들은 그럴듯한 ‘작품’이 되어 대중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앞에서언급한 그의 화려한 데뷔 무대를 기억한다면 이 이야기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에게 진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의 예술적 재능을 따지기 전에 먼저 살펴볼 것은 남다른 행적입니다. 그는 거리 예술의 일부이자 유일한 ‘기록자’였습니다. 거리 미술의 진가를 알아보고, 흠모하고,지원해왔지요. 그런 그가 예술가로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앞으로 두고볼 일입니다.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대중의 권한이라면, 어쨌든 최소한의 자격을 얻은 것으로 보이니까요. 가짜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진짜라고할 수도 없는 흥미로운 예술가를 지켜보며, 정작 이 영화를 만든 뱅크시는섣부른 판단을 경계합니다.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을 활용해 자본의 논리를 발견한 것이 티에리의 잘못이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님에도 ‘작품’이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상품’이 된 것이 뱅크시의 의도가 아니듯 말입니다. “티에리는 원래 천재였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았던 걸 수도있죠. 예술이 그저 장난거리라는 뜻일 수도 있고요. 제 생각엔 장난은 계속될 거예요. 어떤 면에서 티에리는 원칙대로 했어요. 아무 규칙도 없어야 하지만요.”
대중가요를 저평가하거나 현대미술의 가벼움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성공적인 협업은 예술의 효용과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미술사가 스타니스제프스키는 근현대미술과 문화에 대해 저술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다양한 제도들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된다. (…) 이제 미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시장성이라는 것과, 대중을 위한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문화의풍부한 표현력을 고려한다면, 미술을 ‘고급’으로, 그리고 대중문화와 상업은 ‘저급’으로 동일시하는 판단 기준을 버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어쩌면 이제 예술계는, 마돈나의 25주년 베스트 앨범 제목처럼, 대중의 눈과귀를 사로잡는 이들의 선전을 ‘축하(Celebration) ’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오혜진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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