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화가를 만든 든든한 조력자들. 예술가들의 빛나는 동반자, 화상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훌륭한 화가 뒤에는 늘 뛰어난 화상(畵商)이 있었다. 그들은 세간의 평가에 기대지 않고 후대에 업적을 빛낼 작가들을 알아봤고,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예술계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일찍이 알아본 폴 뒤랑 뤼엘, 피카소와 세잔을 길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앙브루아즈 볼라르 그리고 탁월한 안목으로 미국 미술작가를 후원한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바로 그런 화상들이다.
# 인상파 후원자, 폴 뒤랑 뤼엘
19세기 후반 등장한 인상파 미술을 계기로 화가들은 주관적인 표현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고, 이후 다양한 미술사조도 발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상 이렇게 중요한 획을 그은 인상파 화가들은 1870년대 후반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고군분투했다. 파리 화단에서 ‘정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화풍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완성도가 떨어진 그림으로 여겨졌다. 국가가 공인하는 권위 있는 전시인 ‘살롱 전시’에서는 당연히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들은 1874년부터 1886년까지 12년 동안 8회에 걸쳐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첫 전시를 한 1874년보다도 이른 1872년에 런던에서 이미 이들의 그룹전을 연 사람이 있었다. 화상(畫商)인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이었다. 그는 파리와 런던에 갤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1870년부터 인상파 화가들을 눈여겨봤다. 이후 뒤랑-뤼엘은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리의 개인전을 열어줬다.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인상파 대가들이지만, 당시 이 화가들의 작품으로 갤러리 전시를 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작품을 판매해야 하는 갤러리로서는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를 신진 작가들의 작품으로 전시한다면 생계에 지장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랑-뤼엘은 이들의 전시만 연 게 아니라 이들에게 매달 월급처럼 작품 지원비를 주고 도록도 만들어주었다. 이 작가들이 앞으로 역사에 중요한 작가들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작가들을 키운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이런 딜러 뒤랑-뤼엘이 각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르누아르는 폴 뒤랑-뤼엘을 그린 유명한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뒤랑-뤼엘이 없었다면 인상파는 서양 미술사에 그렇게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해낸 화상이기에 뒤랑-뤼엘은 인상파와 함께 미술사에 영원히 남았다. 2009년 뉴욕 소더비에서는 ‘뒤랑-뤼엘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소장했던 인상파 작품 7점을 경매하기도 했다.
# 위대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
뒤랑-뤼엘과 비슷한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는 인상파뿐 아니라 이후 작가인 세잔, 반 고흐, 고갱, 피카소, 마티스, 조각가 마이욜 등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었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그린 <빛을 그린 사람들>(영국 BBC 방송국 제작)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후기 인상파 화가인 세잔(Paul Cezanne)이 생트 빅투아르 산 언덕에서 외롭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세잔은 인상파보다도 더 앞서갔기에 매우 외로운 화가였다. 그는 그림의 소재나 주제보다도 형태적인 면, 선, 모양, 색깔, 구도 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 세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쪼개 본 듯이 그렸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 언덕에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한 신사가 언덕을 올라와 세잔을 찾는다. 이미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은 세잔이 그를 퉁명스럽게 대하자 그 신사는 말한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앙브루아즈 볼라르라는 화상입니다. 당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전시와 관련된 일은 제가 다 맡아서 하겠습니다.”
화가에게 ‘당신은 그림만 그리면 된다, 그 이후 일은 내가 다 맡아서 하겠다’고 말하는 건 아주 이상적인 화상의 모습이다. 그런데 화가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판매하는 일을 맡아서 하다니, 화상은 천사일까? 글쎄, 화상은 매우 전문적인 직업인일 뿐이다. 지금 현재 잘나가고 잘 팔리는 작가는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앞으로 오래 남을 훌륭한 작가를 미리 알아보고 키우는 것은 뛰어난 화상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공한 화가들의 뒤에는 안목이 탁월한 화상이 있게 마련이고, 이런 화가와 화상은 각별한 예술 동반자 사이로 남는다. 세잔, 르누아르, 피카소 등 유명 화가들은 모두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피카소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도 볼라르보다 더 많이 모델이 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볼라르가 당시 파리의 화가들과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 수 있다.
# 미국 미술의 후원자,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때로는 컬렉터가 화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반 미국 젊은 작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던 여성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가 그런 경우다. 휘트니 여사는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부잣집으로 시집간 덕에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1900년대 초반인 당시에 인기 있었던 유럽 근대미술 대가들보다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던 미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샀고, 뉴욕 다운타운에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이라는 전시 공간을 만들었다. 거기에서 에드워드 호퍼, 존 슬로운, 로버트 헨리, 아서 데이비스, 조지 루크스 등 젊은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휘트니 여사는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무려 25년 동안 수집했는데, 원래는 그 방대한 컬렉션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미술품을 다루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정작 자국의 새로운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은 기증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휘트니 여사는 자신이 미술관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 현대미술을 연구하는 최고의 미술관인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 생겨나게 되었다. 휘트니 여사는 컬렉터에서 딜러로, 그리고 결국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술관의 설립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피카소의 입체파 미술을 처음 알아보았던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팝아트,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 1960년대 이후 미국 현대미술사를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닌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같은 화상은 미술 작가들 못지않게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뚜렷한 이름을 남겼다. 그래서 화상은 흔히 ‘미술시장의 디자이너’라고 불린다. 물론 화상과 화가들의 관계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관계이다 보니, 좋게 시작해도 나중엔 나쁜 사이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화상은 화가에게 있어 친구이자 후원자이며 사업 동반자로서 매우 중요한 존재다.
글·이규현 | 진행·이소진 | 디자인·최연희 | 사진·김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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