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예 미술의 극치, 나전 경함의 귀향
2만 5,000여 개 나전 조각이 빚어내는 광휘는 900년 세월을 견디고도 영롱하다. 하지만 역사의 모진 질곡을 피하지는 못했다. 나전칠기는 청자, 불화와 더불어 고려 미술을 대표하지만 정작 10여 점이 채 안 되는 온전한 나전 경함은 모두 일본과 미국, 유럽의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고려 나전 경함이 최근 일본에서 환수되었다. 지난 7월 15일 국립중앙박물관회 회장 자격으로 국보급 고려 나전 경함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하나금융그룹 김정태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고려 나전 경함은 문화재로서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고려 나전 경함은 전 세계적으로 아홉 점만이 남아 무척 귀한 유물입니다. 이번에 기증한 나전 경함은 그중 최근에 그 존재가 알려진 것으로 보존 상태가 무척 좋습니다. 지난 5월에 국내에 들여와 국립중앙박물관회 관계자 몇 분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처리실에서 작품을 보았는데, 자개 빛이 여전히 영롱하더군요. 나전 경함의 섬세함에 감탄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희귀한 유물인 데다 예술성이 높고 보존 상태도 탁월해 국보급 가치를 지닌다고 얘기합니다.
Q. 이 귀한 유물을 환수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요, 환수 경위를 알려주세요.
일본의 한 수집가가 나전 경함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꽤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는데, 대체로 박물관이나 절에 보관되어 있어서 돈만으로 유물을 환수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일본 절들도 돈이 많거든요. 또 일본 정부에서 자국 문화재로 지정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개인 소장가를 설득하는 일 역시 쉽지 않습니다. 재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판매하려 들지 않아요. 이번 고려 나전 경함 환수에는 고려산업 회장이자 저희 박물관회 산하 컬렉션위원회 신성수 위원장님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일본 소장가는 팔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신성수 위원장이 집념을 갖고 수차례 일본을 방문해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결과입니다.
Q. 아무 대가 없이 유물을 건넸을 리는 없을 텐데, 유물 환수 기금 마련은 어떻게 합니까?
국립중앙박물관회는 후원 조직인 만큼 후원금을 갖고 있죠. 독지가분들이 후원금을 내주셔서 기금을 마련합니다. 특히 YFM(Young Friends of the Museum)이라는 이름의 젊은 경영인들의 모임이 있는데, 이분들의 마련하는 후원금이 상당합니다.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뜻있는 젊은 경영인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기금을 조성해서 해외에서 유물을 구입해서 국가에 기증하는 것이지요. 이들의 열정 또한 이번 문화재 환수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Q. 국가에서도 우리 문화재 환수 사업을 하지 않나 싶은데, 민간 조직이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국가에서 국민 세금으로 하는 일인데 왜 후원을 해야 하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예산만으로는 해외에 있는 문화재를 되찾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 예술에 관심과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국립중앙박물관회와 YFM과 같은 모임이 있는 것이고 후원을 통해 기금 마련도 하는 겁니다. 돈이 있다고 해외에 있는 우리 유물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컬렉션위원회에 소속된 분들이 고생하는 이유입니다. 국가와 나가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의 일이니 우리도 하는 것입니다.
Q. 국립중앙박물관회 회장으로서 임기 중에 꼭 이루고 싶은 다른 목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번에 고려 나전 경함을 환수했는데, 되찾아야 할 우리 문화 예술 유산이 아직도 많습니다. 고려시대 3대 문화 예술품으로 흔히 나전 경함과 같은 나전칠기, 청자와 같은 도자기 또 불화를 꼽습니다. 그중에 저희 국립중앙박물관회가 이번에 기증한 것이 나전 경함입니다. 고려 불화는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나전칠기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죠. 그러나 놀랍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려불화가 한 점도 없습니다. 민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거나 많은 작품이 해외에 반출되어 있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제 임기 중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할 만큼 예술성이 높은 고려불화를 기증해 많은 분들이 우리 예술을 보고 즐기실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Q. 하나금융그룹의 수장이시니 그 일로만 해도 하루 해가 짧으리라 생각합니다. 철학이나 신조 없이 우리 문화 예술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기 어려울 듯합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문화 예술을 알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나전 경함 같은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풍물놀이나 판소리, 전통 춤과 같은 무형문화재도 보전해야 합니다. 오페라, 오케스트라, 발레, 뮤지컬과 같은 서양 문화도 좋지만 우리의 무형문화재 역시 이에 못지않습니다. 의무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감동도 주고 흥도 주는 것이 우리 문화 예술입니다. 관심을 가지면 알게 되고 즐기게 됩니다. 나라가 없이 국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충(忠)’이라는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중심(中心)’이 됩니다. 나라의 역사와 얼이 담긴 문화 예술이야말로 우리의 중심 아니겠습니까.
이번 고려 나전 경함 기증은 제 공이 아니라 컬렉션위원장님이나 YFM, 그리고 독지가분들에게 빚진바가 큽니다. 제 회장 임기 중에 환수되어 기증하게 되었으니, 저는 단지 운이 좋을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이유는 보다 많은 분들께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우리 문화 예술을 후원해주시고 즐기시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Q. 마지막으로 <하나은행>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으로 관광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그 나라의 문화유산이 잘 보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국립중앙박물관회 운영에 어려운 점 중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왜 우리가 후원해야 하냐는 생각, 그리고 문화 예술은 공짜라는 인식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입장은 무료지만 우리의 문화 예술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우리 문화 예술이 융성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후원하는 이유는 해외에 나가 있는 문화재를 우리가 갖자는 것도 아니고 보고 없애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보고 또 후대에도 전해 후손들이 즐기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겁니다. 꼭 국립중앙박물관만 후원해달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저 역시 서울시립미술관 후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현대 예술에 관심을 가져주셔도 좋습니다. 다만 많은 분들이 우리 문화 예술을 즐기시길, 그래서 우리 문화 예술이 발전하고 또 여러분의 삶이 윤택해지길 바랍니다.
인터뷰, 글·박동수 | 디자인·김기한 | 인물 사진·한상무 | 자료 제공·(사) 국립중앙박물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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