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그린 그림 : 연인의 뒷모습과 남은 자리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영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 한숨처럼 짧은, 찰나의 추억만을 남기고 기억의 그림자 뒤편으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젊음도, 꽃도, 그리고 사랑도 그러하다.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긴 회한과 마르지 않는 눈물, 그리고 긴긴 불면의 밤이 기다리고 있다.
영국의 라파엘 전파 화가인 아서 휴즈(Arthur Hughes)의 <4월의 사랑>은 봄의 꽃처럼 활짝 피었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사랑의 뒷모습을 포착한 그림이다. 아마도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일, 꽃처럼 곱게 자란 처녀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보라색 드레스 위에 하늘하늘한 얇은 숄을 걸친 모양새가 분명 거울을 보고 열심히 꾸민 듯한 모습이다. 하얀 팔에도 같은 보랏빛 리본이 앙증맞게 매어져 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은 공들인 치장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하며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캔버스를 자세히 보면 이 그림 안에는 숨겨진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처녀의 뒤편, 왼쪽 팔 근처에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 속 처녀는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분홍 꽃잎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의 포즈는 떨어져버린 꽃잎처럼 자신의 사랑이 이른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그림 속의 사연이 어렴풋이 짐작 된다. 양갓집 규수인 처녀는 아마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집안에서 반대할 수밖에 없는 신분의 남자와 남몰래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는 4월의 어느 날, 늘 만나던 밀회장소로 처녀를 불러낸다. 처녀는 연인을 볼 생각에 들떠서 아끼 던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곱게 빗고 나온다.
그러나 모처럼 만난 두 연인은 무언가 심각한 말다툼을 벌이고, 남자는 절망에 빠져 말을 잃은 채 웅크려 앉아있다. 처녀는 두 사람의 차이가 메울 수 없는 심각한 엇갈림임을 절감하며 떨어진 꽃잎들을 바라본다. 한때는 탐스럽게 피어오르던 자신의 사랑이, 땅에 떨어진 꽃잎처럼 덧없는 종말을 맞았음을 실감하면서.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작품 중에는 문학 작품이나 역사적 사실 등에서 모티프를 얻어온 그림들이 많다. 최초로 라파엘 전파 형제 동맹을 맺은 세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존 에버렛 밀레이의 <블랙 브룬스위크 병사>도 그렇다. 그림 속에서 검은 군복을 입은 남자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 하고 슬픈 얼굴의 여자는 한사코 그런 남자를 가로막고 있다. 벽에는 다비드가 그린 유명한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사화가 걸려 있다. 이 액자는 밀레이가 그림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해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다.
남자가 입고 있는 군복은 나폴레옹에 의해 강제로 합병된 독일의 작은 공국 브룬스위크의 연대 제복이다. 삽시간에 나라 를 잃은 브룬스위크의 젊은이들은 공국의 마지막 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블랙 브룬스위크 연대’를 조직해서 프랑스와 맞서 싸우는 나라는 어디든 가서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이 연대는 1815년 워털루에서 열린 나폴레옹-연합군 간의 마지막 전투에 참가해서 대부분 전사한다.
밀레이는 이 전설적인 블랙 브룬스위크 연대의 활약에서 그림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블랙 브룬스위크 병사인 남자는 지금 분명 최후의 일전,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길이다. 그러나 연인은 한사코 남자의 앞길을 막는다. 이 전투에서 과연 남자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역사는 이미 워털루 전투에 참전한 블랙브룬스위크연대가 모두 전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자의 슬픈 얼굴은 바로 이 헤어짐이 이들의 마지막 이별이 될 것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밀레이의 그림은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남자는 자유, 평화, 조국 같은 거창한 신념들에 자신을 바치지만 여자는 그저 가정의 안온함과 안락한 생활만을 추구하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은 이처럼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었다. 여자들 대부분은 엇비슷한 집안의 남자가 청혼해오면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티소가 그린 <선장의 딸>에 등장하는 여자는 다르다. 그림 속의 여자는 단호하고도 싸늘한 표정으로 망원경을 든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여자 뒤편에 앉은 남자 두 사람은 아마 여자의 아버지인 선장과 그의 배를 타는 선원일 것이다. 선원 복장의 젊은이는 손에 위스키 잔을 들고 있지만 취한 모습은 아니다. 그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다. 영화처럼 이 작품에 다음 장면이 있다면, 아마도 남자는 손에 든 위스키를 한번에 들이켠 후, 술기운을 빌려 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것이다.
내성적이지만 성실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이미 옆에 앉은 여자의 아버지에게 호감을 산 상태다. 그러나 여자는 이 남자의 구애를 받아들일성 싶지 않다.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여자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여러 제약들을 뿌리치고 ‘바다’가 상징하는 널따란 세상으로 나아가 자신의 꿈을 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그림의 다음 장면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여자는 성실하지만 평범한 남자의 구애를 거절할 테니 말이다. 뒤편 하늘에 가득한 구름이 이 사랑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실해 보이는 이 남자는 결국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게 될까? 간절한 바람처럼 사랑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애당초 쉽게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애당초 상대를 잘못 골랐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과 여자가 원하는 삶의 방향은 이미 명백히 다른 쪽을 가리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이 그림에는 사랑의 중요한 진실이 숨어 있다.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오래간다. 사랑은 순간의 뜨거운 열정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길을 비추는 등불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글·전원경 | 진행·이소진 | 디자인·김재석 | 사진·이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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